이선미 칼럼니스트
고양생명의전화 상담 매니저, 심리학자

이선미 칼럼니스트
이선미 칼럼니스트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교통카드 겸용인 체크카드가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평소 현금없이 다니는게 습관이 되었지만, 할 수 없이 현찰을 조금 챙겨 집을 나섰다. 막상 호주머니에 돈이 있지만 나들이는 불편하였다. 지하철를 타는 것부터 인내심이 필요했다. 교통카드 한 장이면 프리패스였건만, 새삼스레 터치스크린에서 노선을 자세히 살핀 후 원하는 역을 터치하고 표를 뽑아야 했고, 내릴 때는 기계에서 다시 보증금 명목의 현찰 몇 푼을 환불받아야 했다. 하기사 지하철뿐 아니다. 요즘은 현금없는 버스도 간간히 눈에 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우린 마치 오래전부터 당연히 그래왔던 것처럼 여기며 살고 있다.

이는 결국 ‘시간’ 때문이다. 시간은 이제 돈이 아니라 ‘신’(神)이다. 세상은 그저 빠르고 신속한 것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갑갑하고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다. 경제적 거래나 소비생활도 마찬가지다. 번거로운 현금 거래보다는 사이버 세계에서 순식간에 교환되는 것이어야 한다.

햄버거 가게에서 기계로 음식을 주문하면 비대면으로 주문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지고 그만큼 시간이 확보된다. ‘시간을 그렇게 많이 벌어서 어디다 쓸까?’싶지만, 힘들게 번 시간이 남아돌기라도 하면,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스마트폰에 가있다. 힘들게 번 시간과 맞바꿀 가치도 없어보이지만, 화면 속 영상과 이미지에 다들 혼이 나가있다. 그 속엔 수많은 정보들이 알고리즘의 능선을 타고, 온갖 허접한 것들을 실시간으로 쏟아낸다. 그토록 어렵게 번 시간을 허투루 쓰면서도, 그렇게 시간에 쫓기며 빠르게 살고들있다.

그런 가운데 가장 빠르게 사라져 가는 ‘느림’의 상징이 현금이다. 택시 탈 때도 현금이 사라지고, 카드 아니면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결제한 지도 오래되었다. 버스 쉘터(버스 정류장)의 잠시 기다림도 지루하기 짝이 없다. 이에 다음 버스가 언제 올 것인지 디지털 전광판의 자막이 친절하게 알려준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처리되고, 말로는 ‘느림의 미학’ 운운하지만, 실제 생활에선 용납되기 어렵고, 깔끔하고 빠르고 세련된 사회에서 그런 ‘미학’을 실천하다간, 나홀로 미아가 되기 쉽다.

그나마 전통시장에 가면 아직도 현금이 대세인 곳이 많다. 전자식 결제가 보편화된 교통수단이나 프랜차이즈 상점 등과는 정반대다. 그런데 현금없는 사회에 익숙해진 터라 그 또한 불편하다. 미처 현금을 챙기지 못했는데, 카드도 안 받을 때가 많아 핸드폰으로 계좌 이체를 해야 하는 불편함을 겪어야 한다. 그럴 때면 ‘전통시장 답게’ 와이파이도 느리게 터지고, 이체가 쉽지않아 은근히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현금은 멀지 않아 사라질 운명이다. 모든 돈 거래가 원격 온라인으로 이뤄지고, 빳빳한 지폐나 알토란 같은 촉감의 500원짜리 동전을 보거나 만져보는 일은 더욱 생소해 질 것이다. 돈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오로지 모니터 속 숫자로 보여줄 뿐, 정작 만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예전 직장인들은 매달 누런 봉투에 담긴 월급을 애타게 기다렸다. 아내한테 통째로 주기 전, 아쉬움 속에 한번쯤 돈을 만져보기라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물질’로서의 돈은 볼 수 없을 것이다. 그 기분좋고 풍만한 돈의 질감을 느껴보는 일도 다신 없을 것이다.

‘현금없는 사회’가 어떻게 더 변화하고 진화할지 모르겠다. 다만 편리하고 신속함을 위해 우리는 온라인 공간의 물신(物神)을 날로 숭배할 것이다. 100m 달리기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듯이, ‘빠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더 이상 ‘천천히’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빠르게 줄달음치는데 걸리적거리는 현금 거래는 더 이상 디지털 세상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게 되었다. 현금을 사용해선 안 된다고 그 누구도 강요한 바 없으나, 더 이상 현금이라는 아날로그 화폐가 주는 느림과 불편함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너도나도 현금없는 화폐경제의 적극적 구매자가 되고 있다. 인류가 물물교환 시대를 벗어난 이래, 처음 겪는 일이다. 아무튼 ‘탈 아날로그’의 흐름을 향유하되, 또 한편의 ‘낮설게 보기’도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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