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미 칼럼니스트
고양시생명의전화 상담 매니저, 아동·청소년심리학자

이선미 칼럼니스트
이선미 칼럼니스트

재미가 없다는 건 뇌에서는 곧 종말을 의미한다. 뇌는 재미없고 지루하고 의미 없는 것은 가차없이 지워버린다.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을 생각해 보자. 아무런 충돌도 없는 일상은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서로 뭔가를 하려다 맞지 않아 싸우거나 함께 고생했던 때, 가슴 벅차게 행복했던 순간, 뭔가 엄청나게 노력했던 때가 훨씬 오래 기억에 남는다. 왜 그럴까? 우리의 ‘몸’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캐나다 심리학자 도널드 헤브(Donald Hebb)는 연구실의 실험용 쥐 몇 마리를 자녀들에게 구경시켜주기 위해 집으로 가져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랬지만, 나중에 헤브는 깜짝 놀랄 결과를 얻었다. 아이들의 손길과 집 안의 다양한 환경을 경험한 쥐들이 실험실에 갇혀 있던 쥐들보다 학습능력이 월등히 높았던 것이다. 헤브는 이런 현상을 ‘사용 의존적 가소성(use-dependent plasticity)’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여러나라에서 비슷한 실험을 진행했다. 1960년대 버클리 대학에서는 다양한 자극과 놀거리가 있는 공간의 쥐와, 그렇지 않은 쥐들의 뇌의 크기와 무게, 지능을 측정했다. 모든 면에서 다양한 자극을 받은 쥐가 월등히 머리가 좋았다. 즉 환경이 풍요로워지면 뇌세포의 시냅스가 새로운 가지돌기(dendrite)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고 지능이 높아지는 것이다.

오늘날 스마트폰 검색하는 모습을 보자.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옮기는 것이 전부다. 반대로 지식을 얻기 위해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거나 현장을 직접 찾아간다고 생각해보자. 밖에 나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고, 두 발로 걷고 사람을 만나고 수백 수천 권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책을 찾는 동안은 풍성한 자극과 움직임이 있다. 가만히 손가락만 움직여 얻는 편리한 정보와, 몸을 움직이며 직접 찾는 정보 중 어느 것이 더 기억에 남고 삶을 지혜롭게 만들어줄까.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시작이 바로 ‘내면 검색’이다. 내가 왜 이 지식을 알아야 하는지, 왜 궁금한지 먼저 물어봐야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진짜 알고있는 것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분야, 아무 것도 모르는 분야의 지식이라면 몰라도, 대부분은 어느 정도 사전 정보는 갖고 있다. 아는 것을 돌이키다보면, 자신이 왜 검색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 단계까지 오면 집중력은 더 높아진다. 뇌에서는 이제 그것을 필히 검색해야 할 중요한 정보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언가를 기억하려면 여러 번 읽어보고 메모해야 했다. 지금은 간단히 스마트폰 사진으로 남겨둔다. 사진을 찍음으로써 내 것이 되었다고 행각한다. 문제는 사진을 찍은 사실조차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심지어 ‘내가 이걸 언제 찍었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럴 때마다 ‘심리적 무력감’ 에 빠져들기도 한다.

‘터치’만 하면 자그마한 화면에서 온갖 정보들이 쏟아져나오는 세상이다. 처음엔 신기하고 그저 놀라웠다. 하지만 어느덧 너나없이 디지털의 깊은 바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어딜 가도 고개를 꺾고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게 우리 시대의 풍경이 되었다. 어찌보면 디지털 기기의 ‘충실한 노예’가 된듯 싶다.

미래의 일을 계획하거나 과거를 기억할 때 우리 뇌는 배외측 전전두피질과 해마를 연결하는 부위가 눈에 띄게 활성화된다. 원시 인류 때부터 그랬듯이, 기억은 과거를 복기한다기보단, 미래를 예측하고 생존의 도구를 찾기 위함이다.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과정이 미래의 가능한 생존 비책과 시나리오를 유추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일상에서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것을 기피한다. 모든 기억은 오로지 스마트폰 캘린더와 알람이 대행해준다. 어제 먹은 점심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방금 스마트폰으로 읽은 게시물도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뇌도 일할 때보다는 놀 때가 더 많아지고, 나의 주체적 인식의 분량도 줄어든다. 정작 소중한 것에 연결하고 접속하는 것은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가 만개할수록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탈(脫)접속’이다. ‘디스커넥트’(disconnect)를 통해 진정한 ‘커넥트’(connect)를 이루기 위한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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