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에세이 5] 패션디자이너 이광희 부띠크 대표 ③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사람은 사람을 먹고 산다

목사의 아내로서 목양의 조력자가 되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간호사와 청소부, 조리사를 마다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늘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실천했고 침묵의 삶을 영위해 왔다. 어느 날,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옷감이 전혀 다른 옷을 입고 딸집을 방문했다. 늘 무명옷만 걸치시던 어머니의 달라진 모습에 이광희 대표는 너무 기뻤다. 그런 기쁨도 잠시, 이 대표는 또다시 울음을 삼켰다. 곰팡이가 피어 폐기하려고 지하실에 잠시 보관해 뒀던 커튼을 집으로 가져가 삶고 말린 뒤 당신의 옷을 만들어 입고 오신 것이 아닌가. 평소에도 어머니는 갈포벽지의 안쪽에 붙어 있는 그물망을 분리해 옷을 만들어 입곤 했다. 이렇게 평생 청빈함과 성실함으로 살아온 어머니는 어느 날, 이 대표에게 “사람은 사람을 먹고 산다.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도 살지만 먹을 사람이 없으면 죽는다. 너는 사람에게 먹혀 봤느냐”고 질문했다.

이 대표는 순간 당황했다.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과 배려를 먹고 산다는 뜻이다. 즉 사람은 사람과 어울리고 대화하면서 자라고 누군가의 사랑과 희생 속에서 성장해 간다는 어머니의 깊은 속뜻을 이 대표는 뒤늦게 깨달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나이가 90세쯤일 때다. “엄마,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사세요?”라고 물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사람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데, 나는 지금 어느 선(線)에 속해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단다. 그런데 너는 어디에 속해 있느냐.”

그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선(線)이란 바로 경계다. 선(善)과 악(惡), 정의(正義)와 불의(不義)의 경계를 말한다. 만약 선한 경계에 섰다면 주저하지 말고 실천하고 이를 내일로 미루면 악이 된다는 말씀이었다. 어머니는 이렇듯 그 누구보다 강하고 담대했지만 늘 갖은 병치레를 했다. 한 숟가락만 더 달라는 배고픈 아이들의 표정을 읽고 당신의 밥그릇에서 한 숟갈씩 덜어내다 보니 어머니의 밥그릇은 늘 텅 비었다. 어머니의 몸무게는 평생 38kg를 넘긴 적이 없었다. 한쪽 다리가 마비되어 서울대학병원에서도 포기할 정도로 절망적인 상태에 놓였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등대원 아이들이 뜸북이를 잡아와 어머니에게 드시게 했다. 여린 소녀들의 이런 지극정성이 하늘에 미쳤는지 어머니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또 하나의 고민거리가 생겼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에 반대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불타오르면서 아버지는 해남, 강진, 장흥 등지에서 시국기도회를 여는 등 투쟁의 선봉대에 섰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일정상화 회담 반대를 위한 연판장을 수만장 받았다. 문제는 이 연판장을 청와대에 전달할 사람이 없었다. 모두가 꽁무니를 뺐다. 어머니는 ‘죽으면 죽고 당하면 당한다’는 에스더의 심정으로 연판장 뭉치를 청와대에 전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의로운 여인이기도 했다. 당시 하나님 전상서의 주인공인 오 전 총장도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됐다.

“사모님은 저에게 면회를 와서 ‘참으로 장한 일을 했다’며 격려하셨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청년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으면 그러한 나라에 소망이 없다. 내가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겠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꽃이 된 어머니

2003년 이 대표는 어머니가 쓰러지기 3일전 해남으로 내려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다. 이때 어머니는 이 대표를 광주까지 배웅하겠다고 극구 나섰다. 해남에서 광주로 올라오는 차안에서 둘은 짧은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가 이 대표에게 “베이 굿(Very Good)”하고 뜬금없는 말을 건네자 이 대표는 “무슨 뜻이에요?”라고 물었다.

“너한테 고맙다. 댕큐(Thank you)” 하고서는 웃으면서 “성공의 근본은 참는 거야”라는 말씀을 남기고 이날의 대화는 끝이 났다. 이후 응급실에 입원한 뒤 며칠을 누워있던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주사바늘을 빼고 집으로 가자고 종용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후 어머니는 임종을 앞두고 눈을 감으셨다가 몇초 후 잠시 눈을 뜨고선 방안에 있는 교인들과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시며 환한 미소를 지은 후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어머니 나이는 만 90세.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평생 써온 일기마저 불태웠던 어머니의 투병생활은 18일이 전부였다. 죽는 날까지 스스로 육신을 불태워 한줄기 바람과 함께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은 어머니의 마지막 바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은 안경과 성경, 그리고 책 몇 권이 전부였다. 그런데 어머니의 빛바랜 일기장 일부가 뒤늦게 발견됐다. 아마 잠깐 잊어버리셨을 거라는 이 대표의 생각이다. 1968년 2월 25일 어머니가 쓴 일기장 일부다.

“나는 언제나 꽃이 좋다. 꽃과 같이 고운 생활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나를 보고 싫어하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다. 꽃 한 송이만도 못한 나의 생이여! 나는 사람꽃이 되고 싶다.”

어머니는 거지 밥상에도 늘 꽃 한 송이를 꽂을 만큼, 꽃을 사랑했다. 그래서 이 대표는 일주일에 한 번씩 꽃을 배달하고 집 주위에는 흑장미 200그루를 심어 어머니를 위로했다고 한다.

임종을 앞둔 어느 날, KBS에서 촬영을 나와 가족들은 여간 부담스럽지 않았다. 살아생전 어머니는 어디로 가나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우여곡절 끝에 3부작 다큐 <꽃이 되다>가 방송되면서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겼다. 한때 CTS기독교 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유재건의 나의 어머니>라는 프로에 어머니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사진 한 컷이 공개됐다. 모진 풍파를 견뎌낸 봉사와 헌신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분명, 어머니의 삶은 매 순간이 꽃봉오리였으며 따스한 봄바람을 타고 피어난 한 송이 사람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