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어둠의 자식이 된 어처구니없는 인생'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진흥문화㈜는 박경진 회장이 20여년 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장남인 박형호 사장이 사업을 잇고 있다.
진흥문화㈜ 박경진 회장은 20여년 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장남인 박형호 사장이 사업을 잇고 있다.

한국의 우수한 문화 알려야

박 회장은 “6·25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가난한 나라 후진국이 45년 만에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대국이 됐다”며 “동방의 한 미개한 나라가 아닌,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독창적인 문화를 가진 우수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해외입양아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즉 입양아들이 정체성을 찾아 세계 각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인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런 가운데 페루의 후지모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박 회장의 해외입양아 사업에 대한 꿈은 더욱 부풀어 갔다. 당시 일본인들은 후지모리가 당선되자 자긍심이 하늘을 찔렀다. 박 회장도 한국인 2세나 입양아 중에서도 후지모리 같은 큰 인물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그는 통역을 위해 영어회화 실력을 갖춘 사원을 채용하는 한편 관련 기관과 단체를 찾아다니는 등 발품을 파는데서 부터 매년 수천만원의 행사비용을 충당했다. 지금까지 대략 500여 명의 입양아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입양아 모국방문 프로그램은 서울의 고궁과 유적지를 비롯해 대학 캠퍼스, 청와대, 한옥마을, 한국민속촌, 설악산, 동해안, 산업체, 제주도, 경주 역사문화 유적지 등 보름동안 전국을 투어한다. 여기에는 홈스테이를 비롯해 사물놀이·다도·전통예절교육·태권도 등 다양한 문화체험과 함께 인사동 전통거리, 풍물시장 등을 둘러보기도 한다. 당시 입양아 모집은 주로 미국의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에 의뢰했다. 나이는 18~28세로 제한하되 한국에 와보지 않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모집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울러 대도시보다는 소도시에 살며 한국문화를 접해보지 못한 사람을 우선하는 원칙을 세워서 진행해왔다.

부모가 우리를 팔아먹었어요

박 회장이 기억하는 또 다른 사례. 아홉 살에 입양됐다가 17년 만에 모국방문길에 오른 데니스라는 청년이야기다. 한국말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계자들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데니스는 생모를 비롯 형제들을 만났지만 눈물만 보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관계자들은 발을 동동 굴려야 했다. 데니스는 열세 살 된 누나와 함께 미국의 한 가정에 입양됐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이들 남매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나이였다. 어린 남매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방구석에 쪼그려 앉아 비장한 각오를 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배워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말을 버리고 미국말을 배우자. 이제 오늘부터 한국말을 쓰는 사람에게 알밤을 주기로 하자.”

어린 남매는 이렇게 야무진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 한없는 원망과 눈물,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이들 남매는 세월과 함께 ‘어머니’라는 단 한 마디까지 잊어버렸다. 데니스의 입이 터진 것은 생모의 회고 한마디 때문이었다.

“당시 너의 아버지는 폐결핵으로 누워 있었고,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나의 반대도 불구하고 작은 아버지가 나서서 입양을 보냈단다. 그런 이유로 마음의 병을 얻어 지금껏 고생을 하고 있단다.”이 말을 듣는 순간 데니스는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까지 부모가 우리를 팔아먹었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어떻게 자식을 버릴 수 있을까 하고 원망을 많이 했어요. 이제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생모와의 극적 화해는 이렇게 해서 이뤄졌다. 대다수 입양아들에게 따라다니는 정체성 문제는 이런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박 회장이 벌이는 해외입양아 모국방문 초청행사의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날 가난 때문에 달팽이 생활을 하면서 울어야 했던 박 회장은 이제 자신보다 타인을 위한 봉사와 나눔의 삶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다. 환갑잔치를 하지 않은 대신 1억원을 쾌척해 진흥장학재단을 설립한 뒤 성수동 건물을 국가에 기부 체납했다. 여기서 나오는 연간 9000만원 가량의 임대수입은 모두 장학기금으로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그가 태어난 고향마을의 노인회관 건물 외벽과 내부 리모델링 공사비 20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가 20년 전 살았던 아파트는 이미 왕십리 교회 신축헌금으로 사용됐고,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도 그가 다니고 있는 교회 앞으로 명의를 등기해 놓았다. 박 회장 부부가 세상을 떠나면 교회 관사로 쓰라는 취지다. 어차피 인생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법.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의 마지막 바람이자 꿈이라고 했다.   <끝>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주요 이력

▲협성대학 선교신학과 졸업(총회) ▲감리교실업인회 회장 역임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 ▲재단법인 진흥장학재단 이사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저서 <역경의 열매 오직 감사>(2011), <어느 병사의 일기>(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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