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어둠의 자식이 된 어처구니없는 인생'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해외여행지에서 찍은 박경진 회장의 기념사진. 박 회장이 1983년 유럽여행에서 사온 성화 등을 바탕으로 제작한 '위대한 생애' 캘린더가 그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진흥문화의 모태가 된다.
해외여행지에서 찍은 박경진 회장의 기념사진. 박 회장이 1983년 유럽여행에서 사온 성화 등을 바탕으로 제작한 '위대한 생애' 캘린더가 그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진흥문화의 모태가 된다.

하루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가 길가에서 땅을 파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제가 오늘 할 일도 없고 마침 어깨가 근질근질한데 땀이나 한번 내보겠다”며 곡괭이를 빌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짜로 일을 해줬다. 이렇게 일자리를 얻어 잠시나마 가족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문패 달아주는 가방을 둘러메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캘린더 영업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곧장 인쇄소로 들어갔다. 이날 캘린더 샘플을 몇 개 들고 인근 약국으로 향했다.

“신년도 달력을 만들어서 약국에 오는 손님들에게 나누어주면 많은 홍보가 될 수 있습니다.”

박 회장에게 죽으라는 법이 없었는지 이날 한 장짜리 캘린더 200매를 주문받았다. 신이 났던 박 회장은 건어물상회, 생필품가게, 한복집, 쌀집, 정육점 등을 밤늦게까지 돌아다녔다. 그렇게 시작한 캘린더 영업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것이라곤 이때까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쌀집에서 한 달 일한 봉급이 쌀 다섯말인데, 약 3개월 영업을 해서 얻은 봉급이 무려 쌀 20가마라는 놀라운 성과를 내면서 그에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1976년 종로 방산시장 내 7평 규모의 사무실에 진흥문화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후 1982년 그는 일본의 캘린더 회사를 견학했다. 당시 연간 1500만 부의 캘린더를 생산하는 대형업체였다. 무엇보다 회사대표의 사람 대하는 태도가 겸손했고 회사를 검소하게 운영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때 받은 충격은 이듬해 유럽여행으로 이어진다. 1983년 박 회장은 빚을 내 3주 동안 여행을 하면서 필름, 책, 슬라이드, 성화 등 기독교 문화와 관련된 물건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캘린더 사업을 위한 밑그림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당시 캘린더는 국내에서 2만부만 팔려도 대성공이었다. 박 회장은 유럽에서 사온 그림을 다시 그려 성화와 붓글씨, 성구를 넣은 캘린더를 제작, 그해 자그마치 53만부를 파는 등 공전의 히트를 쳤다. ‘위대한 생애’라고 하는 캘린더 이름이 가져다 준 선물이 바로 오늘날 진흥문화의 모태가 됐다. ‘박경진’이라는 사업가도 이때서야 비로소 세상에 위용을 드러낸다. 현재 진흥팬시, 진흥갤러리, 진흥홀리투어, 진흥기독백화점, 도서출판 진흥 등 10여 개의 계열사를 둔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당시 유럽여행에 동행했던 초등학교 동창생은 박 회장에게 “너와 내가 똑같이 여행을 갔는데, 너는 그 여행을 통해 오늘의 진흥을 일구었다”며 “너의 안목과 결단은 탁월했고 적중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박 회장은 20여 년 전에 일선에서 물러났고 그 뒤를 박 회장의 큰 아들인 박형호 사장이 대를 이어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또 하나의 가족, 해외입양아 사업

“미국에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에게 미국인이 자주 묻는 말이 있었어요.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어요. 언어는 분명히 완벽한 영어인데… 외모가 동양인이기 때문이지요. 그때마다 많이 망설였어요. 동양의 제일 큰 나라 중국인이라고 할까? 아니면 일등국민 일본인이라고 할까. 아니면 한국인? 정체성이 흔들렸어요. 그러나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그동안의 모든 갈등이 풀렸어요, ‘나는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바로 대한민국 사람이다. 그리고 당연히 입양아다’, 그 소녀는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어요.”

1999년 해외입양아 초청 대상자였던 사라 모르간(당시 18세) 양이 행사 마지막날 눈물을 글썽이며 감상문을 읽어 내려가던 장면이다. 박 회장이 해외입양아 모국방문 사업을 한 것은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회사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로 진행됐다. 사람도 스무살이 되면 성년으로 책임을 지듯이 기업도 사회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됐다. 그간 사업을 위해 해외를 다니면서 수많은 입양아들의 고통과 번민을 생생하게 목도했던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다.

하지만 진흥문화에도 IMF라는 광풍이 불어닥쳤다. 박 회장은 자신이 타고 다니던 승용차를 팔아서 회사 경리과에 입금시키는 등 자린고비 경영에 돌입했다. 문제는 1996년부터 진행해온 해외입양아 모국방문 행사를 앞두고 이를 계속 진행할지를 놓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박 회장은 회사가 다소 어렵더라도 이 사업만큼은 중단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경영자의 독단은 어려울 때일수록 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사원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다. 예상과 달리 반대여론이 70%였다. IMF로 인해 거리로 내몰리는 국내의 어린아이들도 부지기수인데, 굳이 무리하게 돈을 들여 입양아 초청사업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박 회장은 직원들의 냉정함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사원들의 뜻을 존중해 초청을 중단했다. 그러나 그해 8월 박 회장과 무관하게 미국의 한 단체에서 자비로 23명의 입양인이 한국을 방문하는데, 박 회장에게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한 특강만 해달라”고 하소연하면서 가까스로 사업을 이어가게 된다. 해외입양아 모국방문 사업이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 즉 하나님의 사명 같은 힘이 느껴졌다는 설명이다.   <계속>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주요 이력

▲협성대학 선교신학과 졸업(총회) ▲감리교실업인회 회장 역임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 ▲재단법인 진흥장학재단 이사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저서 <역경의 열매 오직 감사>(2011), <어느 병사의 일기>(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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