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어둠의 자식이 된 어처구니없는 인생'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오늘의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을 있게 한 8할은 독실한 '신앙의 힘'이었다. 사진은 산상기도하는 박경진 회장. 

반쪽 인생의 광야운동

박 회장이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교회장 선거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당시 입후보자는 박 회장과 김용응이라는 친구, 두 명이었다. 투표용지에 기표를 하려는 순간, “경진아! 너는 반쪽, 50%밖에 안되잖아. 용응이는 100%인데… 네가 양보해라”는 소리가 심장을 두드렸다. 순간 박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상대후보인 친구에게 표를 찍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 그만큼 박 회장은 열등감에 떨어야 했고 그 뿌리 또한 깊고 단단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그는 또 지게를 지고 들판으로 나가야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 늘 우등생이었던 터라 배움에 대한 갈증 또한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낮에는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고 밤에는 강의록을 구입해 기초영어와 한문을 배우고 각종 원예서적을 사다 보는 등 주경야독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겨울철에는 산으로 올라가 땔감을 해서 시장에 내다팔아 돈을 벌었다. 당시 땔감을 하는 것도 버거운 나이였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30리길을 걸어야 하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일 땔감을 팔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등짐을 지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돌고 돌아 땔감을 모두 팔고나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교복을 입은 친구들과 마주칠 때 가장 고통스러웠다는 그의 회고다. 그는 어린 나이였지만 원예재배법을 배워 형님과 함께 원예 농사를 지으면서 돈 맛을 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의 꿈도 조금씩 영글어갔다. 돈을 모아 눈을 고치고 사람답게 사는 게 그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되던 1957년 때다. 그는 집안의 제삿날을 틈타 그동안 말로만 듣던 꿈의 도시인 서울로 도망을 쳤다. 여태까지 자신의 고향을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던 그는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넓은 세상구경도 했다. 그러나 낯선 서울에서 그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서울의 거리를 샅샅이 뒤졌지만 모두 허사였다. 신체적 장애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당시 인천에 사는 형님의 설득으로 결국 박 회장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가출은 이렇게 허망하게 막을 내린다.

고향으로 내려온 박 회장은 농사는 물론 더욱 강해진 믿음으로 신앙생활에 들어간다. 새벽기도는 기본이었다. 하지만 겨울철 새벽기도는 적잖은 고통이 뒤따랐다. 새벽에 얼음을 깨고 냉수마찰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단 하루도 새벽기도를 포기하는 날이 없었다. 또한 박 회장은 매주 두 번씩 금식을 통해 아낀 쌀을 교회에 성미로 바쳤다. 이를 두고 박 회장은 ‘광야운동’이라고 불렀다. 예수를 믿은 지 70년, 이 가운데 50년 동안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감사헌금을 드렸다고 한다.

찢어지게 가난해 먹을 것이 없어도 감사헌금만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켰다. 한 끼 먹는 것도 신통치 않던 시절, 육체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지만 그는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낮에는 집에서 농사를 짓고 밤에는 교회 건축현장으로 달려가 밤을 새우다시피 하는가 하면 새로 부임하는 목회자들의 가사는 물론 이른 새벽, 주인도 없는 신도의 논으로 달려가 모내기 일을 해 놓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런 선행이 온 동네로 퍼져 의리의 사나이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목회자에 대한 섬김이나 노력봉사는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어느 날 자신이 믿고 따르던 전도사가 이웃 교회에서 목회를 위협받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집안일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보따리를 싸고 전도사가 사는 동네로 이사를 가서 맨손으로 야산 5000여 평을 개간하는 뚝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사라져버린 여동생

전도의 열기가 최고조로 달리던 어느 날은 자신이 돌보고 있던 청년이 사소한 문제로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자 모루산 정상에 올라 60일간의 철야기도를 하는 등 그의 신앙심은 곳간에 양식이 채워지듯 깊이를 더해 갔다.

이런 가운데 박 회장은 초등학교 시절 학생회장 선거에서 자신이 양보했던 김용응을 3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총학생회장이 아니라, 동창회장 선거에서 맞붙어 박 회장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된다. 고등학교 제복을 입고 우쭐대는 친구보다 다소 부족해보이지만 겸손해 보이는 박 회장에게 표를 몰아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 회장이 스무 살이 되던 해다. 이때까지 그는 자신의 눈을 고치겠다는 꿈만 꾸었을 뿐 병원 문턱조차 가보지 못했다. 그러던 터에 서울에서 공장생활을 하던 막내 여동생이 긴급 호출했다. 공장에서 눈칫밥을 먹으면서 한 푼 두 푼 모아 둔 돈으로 박 회장의 눈을 고쳐주겠다고 한 것이다. 가난과 장애에 대한 열등감으로 가슴아파하던 오빠의 한을 풀어주고 싶었던 여동생의 갸륵한 마음에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어둠의 자식으로 살아온 20여 년의 그림자는 걷힐 수 있을까. 박 회장은 여동생과 함께 서울의 안과병원 이곳저곳을 찾아다녔지만 거의 비슷한 진단이 나왔다.

“눈동자는 깨끗한데 20년 동안 사용하지 않아 시신경의 기능이 매우 약해졌습니다. 특히 눈꺼풀 시신경이 마비되었는데 시신경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이 아직 없습니다. 다만 이마 신경을 근육과 연결해 눈꺼풀을 인위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는 있습니다.”

드디어 그토록 고대하던 수술을 마치고 일주일 뒤 실밥도 풀었다. 한쪽 눈이 거의 감겼던 그의 눈은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50%’에서는 다소 벗어났다. 이때부터 비로소 박 회장은 자신감도 생기고 그간의 상처도 조금씩 치유가 되기 시작한다. 그가 군 생활을 하던 중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그런 여동생에게 사고가 터졌다. 1968년 어느 날, 당시 제주 우체국에서 주민등록증만 고향으로 배달되었을 뿐, 여동생이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박 회장은 군복무 중이라 아무런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태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말았다. 오빠의 한을 풀어주고 세상 어디론가 사라진 여동생에게 정작 박 회장은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도 못한 채 가슴에 또 하나의 한을 쌓고 말았다.   <계속>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주요 이력

▲협성대학 선교신학과 졸업(총회) ▲감리교실업인회 회장 역임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 ▲재단법인 진흥장학재단 이사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저서 <역경의 열매 오직 감사>(2011), <어느 병사의 일기>(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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