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어둠의 자식이 된 어처구니없는 인생'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최전방 군복무 시절의 박경진 회장. 3년 군생활 중에서 2년간 하루도 빼놓치않고 일기를 써 2013년 '어느 병사의 일기'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최전방 군복무 시절의 박경진 회장. 3년 군생활 중에서 2년간 하루도 빼놓치않고 일기를 써 2013년 '어느 병사의 일기'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어처구니없는 인생

박 회장은 1964년 결혼을 한 뒤 이듬해 첫딸을 낳았다. 그리고 1966년 느닷없이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당시 호적의 나이는 23세지만 그의 본래 나이는 27세였다. 출생신고가 4년 늦게 된 탓이다. 그의 눈은 ‘외눈박이’였고 시력도 0.3에 불과했다. 누가 봐도 군은 면제라고 생각됐다. 그래서 박 회장도 잠시 수용연대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가 발목이 잡히고 만다. 신체검사를 받았지만 군의관은 “한쪽 눈의 장애가 군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며 입대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것이다. 박 회장은 보름동안 대기상태로 있다가 군의관의 의심을 사느니 차라리 입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다. 궁리 끝에 재검사를 요청, 신체검사에서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인다고 거짓으로 둘러대 결국 논산훈련소에 입소한다.

박 회장은 당시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고 술회한다.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최전방 부대로 배치된 그는 얼떨결에 사회에서 면서기를 했다고 둘러대 서무계에서 군 생활을 하게 된다. 허나 스물일곱에 시작된 그의 군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늘 두고 온 딸과 아내가 눈에 밟혀 단 하루도 편안하게 잠드는 날이 없었다. 그는 3년간의 군 생활을 하면서 2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다. 1968년 그 해의 기록을 모아 2013년 ‘어느 병사의 일기’라는 제하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월남을 한번 가고 싶다. 한 잎의 낙엽 같은 인생을 좀 더 짧고 굵게 살아보고 싶다.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다. 전장에서 생명의 존엄성도 삶의 보람도 체험해보고 싶다. 이곳은 전장이 아니란 말이냐. 같은 고생을 하고 고달픈 생활을 할 바에는 창해를 한번 떠다니며 체험의 인생이 되고 싶다.”<2.17일 토요일 맑음>

“집 없는 달팽이 모양으로 남의 집에서 해산을 해야 하고 부모형제도 없는 것처럼 수백리 타향에서 부모도 없이 아니, 남편도 없이 생산을 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니 정말로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다.”<4.27일 토요일 맑음>

“세상에서 배우지 못해서 멸시 받는 것처럼 통분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입에 붙은 말처럼 배워야 산다고 하고 잠꼬대처럼, 혹은 풍월과 같이 배워야 산다고, 나는 오늘 또 사람은 배워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껴본다, 가슴 아프게 원망스러운 심정, 몸부림쳐도 울어도 과거는 바람과 같이 사라져간다.”<1968년 7월 5일 금요일 흐림>

28세의 군인 박경진의 일기장에 나온 대목이다. 그가 군 생활 2년간 쓴 일기장을 더듬어 보면 초등학교 출신의 문장이라곤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한문 실력 역시 서당 훈장에 버금갈 정도다. 박 회장은 군 생활을 하면서 흔한 욕설 한마디 않고 무슨 일이든 솔선수범했다. 그는 동료들 보다 나이가 너댓 살 많았지만 동료가 휴가를 나가게 되면 용돈을 손에 쥐어 주고 주일날 금식미를 모아 불우한 동료를 챙기기도 했다. 3대 독자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동료의 휴가를 챙기는 것도 마찬가지. 특히 어려운 형편의 동료들에게 친구나 형님이 되어주고 상담역할까지 했다. 1968년 9월 11일 병영일기에 “김삼관이가 500원을, 유덕영이가 200원을 봉투에 넣어주고 달아난다. 파견 나갔던 김배상이 금일봉을 넣어 보내왔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봉급이 520원이던 때다. 그는 돈 씀씀이도 남달랐다. 이미 제대를 한 동료에게 봉급을 모아 성경책을 사서 보내고 지인들을 동원해 취직을 알선하기도 했다. 동료들은 “모래사막에서도 살아남을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그에게 잊지 못할 사연이 하나 있다. 당시 원주에 살고 있던 동료 윤봉기의 결혼식을 참석하지 못해 두고두고 한이 됐다고 한다. 박 회장이 제대 후 철거민촌에서 살다보니 축의금은커녕 끼니를 걸러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의 아쉬움으로 나이가 들어서 지금까지 수십년 째 그의 결혼기념일을 챙겨주고 있다.

이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는 군 생활을 하면서 서무계의 위력(?)을 동원해 동료의 월남 파병을 돕기도 했다. 당시 독자인 경우 월남 파병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김용영은 월남 파병이 끝난 뒤 독일 광부로 나가 돈을 벌어 박 회장이 막내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이국땅에서 축의금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 돈으로 박 회장 부부는 시장에 나가 담요를 샀는데, 지금까지 50여 년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박 회장에게 수많은 동료들이 찾아왔지만 철거민촌에서 거지꼴로 살고 있는 박 회장의 모습을 보고 다들 발길을 끊는 아픔도 겪었다는 회고다. 박 회장은 “당시 내가 조금 잘 살았더라면 군대에서 만난 친구들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박 회장은 그의 말대로 “어처구니없게 군 생활을 하게 됐지만 이 과정에서 나이와 학식, 재능과 인물을 초월하는 계급사회 경험을 했고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고백했다.

위대한 생애 캘린더가 준 선물

결혼은 했지만 살림은 늘 쪼들렸던 박 회장.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난을 그대로 물려받는다는 것이 더욱 괴로웠다. 1969년 제대를 한 뒤 곧바로 이불보따리와 수저, 냄비, 그릇 몇 개를 챙긴 뒤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우선 철거민촌인 난곡동 산비탈에 3평짜리 오두막을 짓고 서울살이에 들어간다. 그러나 서울의 거리는 삭막했다. 따뜻한 기운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미곡상 쌀 배달을 시작으로 양말, 메리야스 등 보따리상을 거쳐 수저, 식칼 등 주방용품을 도매로 떼어다가 파는 리어커 행상은 물론 페인트공, 막노동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살아야 했다. 10년 동안 25번의 이사를 하면서 투잡 쓰리잡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아내도 아이들을 돌보면서 밤에는 철거민촌 산중턱으로 건축용 모래나 연탄 배달을 하는가 하면 달밤 차떼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그들의 삶은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건 막내아들을 낳아 다섯 식구가 된 것 뿐. 오히려 손대는 일마다 사고가 터지기 일쑤였다. 한 번은 페인트칠 공사를 했다가 사단이 나고 말았다. 대문과 처마 등 색깔을 구분하지 못해 주인의 요구와 반대로 페인트 공사를 해버린 것이다. 자신이 적록색맹인 것을 깜박했던 것. 결국 막노동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계속>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주요 이력

▲협성대학 선교신학과 졸업(총회) ▲감리교실업인회 회장 역임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 ▲재단법인 진흥장학재단 이사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저서 <역경의 열매 오직 감사>(2011), <어느 병사의 일기>(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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