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어둠의 자식이 된 어처구니없는 인생'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충남 서산의 산간벽지에서 태어나 온갖 어려움을 딛고, 10여개 계열사를 둔 중견그룹을 일군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어둠의 자식’ 박경진

그는 1940년 충남 서산의 산간벽지 오지마을 외딴집에서 10남매 가운데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것도 한쪽 눈이 감겨진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바람에 ‘반쪽짜리’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평생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다섯 살 때쯤에는 열병을 앓아 머리카락이 모두 빠질 정도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겨우겨우 살아났지만 열다섯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호적에도 없는 ‘어둠의 자식’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호적등본을 떼러 동사무소에 갔다가 자신의 호적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야 출생신고를 한 기구한 인생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동네사람에게 아들의 출생신고를 부탁했으나 깜박 잊고 그렇게 15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낸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장애 때문에 그는 오두막에서 늘 외톨이로 지냈고 친구들로부터 갖은 놀림과 천대를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그것도 또래보다 늦은 10살 때서야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나중에 커서 ‘사람구실이나 할 수 있을까’ 싶은 태생적 장애를 그렇게 스스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인 건 아닐까. 뒤늦게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장애는 결코 넘지 못할 벽이 아니라, 강하고 담대함을 위한 연단의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이 인다고 했던가! 전염병과 가난으로 형제들 중 사남매는 세상을 떠나야 했고 육남매만이 겨우 생존을 했다. 일평생 머슴살이를 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늘 “주제넘지 마라”, “분수에 맞게 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즉 ‘타고난 대로 살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에게 원망이나 불평 한마디 한 적이 없다. 배움에 대한 그의 분수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초등학교까지가 전부였다. 더이상 상급학교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희망과 꿈이라는 서광이 비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들이 동네 교실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부터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곧 자신이라고 믿었다. ‘연단을 거치지 않은 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는 말처럼 자신의 운명과 맞서왔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그는 서울로 올라와서 사업을 성공시켰고 뒤늦게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 배움에 대한 목마름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었다. 이후 감리교장로회전국연합회 회장과 한국기독교출판협회 회장을 거쳐 현재 한카문화협회 회장 및 한국미래포럼 회장을 맡는 등 각종 기독교 사회단체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바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의 드라마 같은 인생사다. 그의 어머니는 박 회장을 낳은 뒤 입으로 탯줄을 끊은 다음 아직 여물지 않은 보리밭으로 나갔다.

“밭고랑으로 따라다니는 어린것들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먹을 것을 달라고 칭얼거렸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어머니 곁에서 돕는 자식이 있었다. 열세 살의 큰아들이었다. 보리이삭을 따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역경의 열매 오직 감사’ 中/ 박경진 저>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보리이삭을 솥에 넣고 찐 다음 절구에 넣고 비벼서 알갱이를 발라낸 뒤 솥에다가 볶은 다음 이를 맷돌로 갈아서 햇보리죽을 쑤어 먹었다. 미역국 한 그릇 없이 그렇게 어머니는 산후조리를 대신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한쪽 눈을 뜨지 못하자 어머니는 장독대 앞에 정화수를 떠놓고 빌면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길거리에서 주어다 먹은 꿩이 잘못돼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어 어머니는 가슴을 치고 또 쳤다. 어머니가 만삭이 되어가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전봇대 밑에 죽어 있는 꿩 한 마리를 가져와 어머니에게 영양보충이나 하라고 해서 이것을 요리해 먹은 것이 화근이 돼 아들의 한 쪽 눈이 감긴 채 태어나지 않았나 하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렸다. 꿩의 감겨진 눈이 아들의 감긴 눈과 거의 똑같아 보였다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회상이었다. 어머니는 가족 중에 병환이 생겨 앓기라도 하면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등 갖은 정성을 들였지만, 그럼에도 사남매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뜨는 단장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삼신할머니,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잘못한 저에게 천벌을 주시고 자식의 눈은 뜨게 해 주세요.”

그렇게 정성을 다해 치성을 드렸건만 아들의 눈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어머니는 장독대에 올려놓은 정화수를 과감하게 거두고 교회를 나가게 된다. 이후 어머니는 나이가 들어 허리가 구부러졌는데도 불구하고 산에 올라가서 솔방울을 따다가 가마니에 담아 머리에 이고 새벽에 30리가 넘는 거리의 시장으로 나가 팔아 주일헌금, 속회헌금, 월정헌금 등을 내는 등 독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난다.   <계속>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주요 이력

▲협성대학 선교신학과 졸업(총회) ▲감리교실업인회 회장 역임 ▲한국장로회총연합회 대표회장 ▲재단법인 진흥장학재단 이사장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저서 <역경의 열매 오직 감사>(2011), <어느 병사의 일기>(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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