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기업가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③- LG그룹

“한국 GDP(국내 총생산량)의 40%가 넘는 매출을 진주출신 기업가들이 올린다. 그래서 ‘진주를 ‘100년 기적의 도시’라고 불린다. 세계 경영학자들이 인구 36만 명에 불과 한 진주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정영수 진주K-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

지난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간 진주시 능력개발관에서 전국의 대학생과 진주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주K-기업가정신 청년포럼’을 개최했다. 진주K-기업가정신재단과 매일경제가 주최한 이번 행사는 첫째 날 진주가 배출한 국내 4대그룹(삼성,LG,GS,효성) 창업주들의 생가방문에 이어 둘째 날 기업가정신에 대한 강연이 펼쳐졌다. 김기태 GS칼텍스 고문, 박승희 삼성전자 사장, 이명관 LG인화원장, 손현식 효성TNS사장이 연사로 나섰다. 본지는 이날의 강연 내용을 4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일제의 횡포에 맞선 ‘구인회상회’

LG그룹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선대회장의 기업가정신은 ‘인간존중’과 ‘인화단결’, ‘도전정신’과 ‘연구개발’ 등이다. 최근 LG그룹이 표방하고 있는 ‘고객가치 창조’와 ‘인간존중’ 속에 창업주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고객가치는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고 2대 회장인 구자경 시대에 본격 등장한다. 최근 아이만 타라비쉬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연암의 인간존중과 인화단결은 남명의 경(敬)사상이 진화한 것이고 도전정신은 의(義)와 통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명 조식의 경의사상(敬義思想)은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전통을 중시하는 공자의 유교와는 길이 다르다”고 분석했다.

이날 LG그룹의 기업가정신 주제 강연자인 이명관 LG인화원장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경기도 이천 연수원 설경을 배경으로 한 영상으로 보여준 뒤 GS그룹의 기업가정신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 가급적 중첩되지 않은 부문에서 강연을 하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연암은 진주시 승산마을 지수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상경,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2년 만에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학업을 포기하고 귀향을 한 것과 비교적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것은 일제의 수탈이 극심한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이런 결정이 내려진 것으로 보여진다고 이 원장은 설명했다. 고향에 돌아온 연암은 옆집에 사는 허을수와 결혼한 뒤 사업에 뛰어든다. 당시 처갓집으로부터 적지 않은 금액을 투자받아 허씨 집안과 57년간 동업을 하다가 2005년 GS家를 분가시키면서 각 언론에서는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찬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LG그룹의 기업가정신이 GS그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LG家 역시 당대 내노라하는 유학자 집안으로 알려졌다. 연암의 조부인 만회공 구연호는 나라가 망국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낙향, 후학양성에 힘쓰는 한편, 손자 구인회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한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연암의 선친인 구재서 또한 1922년 의령 독립만세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선대의 영향을 받아 구인회는 젊어서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거금 1만원을 희사하고 안 선생과 함께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전달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승산마을 구씨와 허씨들은 이렇듯 일제의 눈을 피해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구국운동에 나섰다. 이뿐만이 아니다. 연암 또한 허씨家처럼 육영사업을 통한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아들인 구자경 회장은 천안연암대학, 연암공과대학 등 기술인력 양성은 물론 연암문화재단을 설립‧운영,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원장은 연암이 사업을 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인들의 착취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그는 “당시 승산마을에 일본인 주축의 소비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잡화점이 하나 있었다”며 “이들이 값싼 물건을 가져와 지나치게 비싸게 파는 등 독과점 횡포가 심해 연암이 이를 지켜볼 수 없어 진주 중앙시장에 포목점을 열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업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이 지배하는 유교사회에서 연암의 도전은 쉽지 않았다. 연암은 부친을 설득하지 못하자 결국 조부에게 허락을 받아 1931년 진주 중앙시장에서 ‘구인회상회’를 열게 된다. 연암에게 백기를 든 부친은 ‣'세상을 얕보지 말 것' ‣'남들과 화목하게 지낼 것' ‣'신용을 얻을 것' ‣'나는 너를 믿는다' ‣'초반에 일이 안된다고 주저앉으면 안된다'고 당부했다고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개척정신의 선구자들

LG그룹의 역사는 연암이 1947년 부산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우고 화장품사업을 하게 되면서 현대적 의미의 사업 여정이 시작된다. 창업주인 연암에 이어 구자경(2대), 구본무(3대)를 거쳐 지난 2018년 취임한 구광모(4대)회장이 LG의 바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원장은 LG그룹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가는 보수적인 기업이다"며 "마케팅이 약하다”는 평가에 대해 “LG그룹이 R&D를 중시한 결과 유난히 엔지니어 출신들이 많다보니 그런 소리를 듣는 것 같다”는 말로 대신했다. 연암은 “이 세상에 여성이 존재하는 한 영원한 것은 화장품이다”라며 시작한 크림생산이 유리용기 때문에 자꾸 깨지는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재빨리 플라스틱 사업을 펼쳤다고 한다. 누가 가르쳐주고 알려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 힘으로 신제품을 개발하고 내 힘으로 시장을 개척하자는 ‘연구개발’에 방점을 두었다. 당시 연암은 전 재산을 털어 플라스틱 장비구입에만 2억~3억원이 소요되는 천문학적 금액을 과감하게 투자하는 등 자신의 도전정신을 라디오, TV, 세탁기 등으로 확대해 나가면서 본격적인 전자산업 시대를 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연암은 1947년 글리세린 원료가 없어 글리콜로 크림을 만들었으나 고객들로부터 나쁜 평가를 받자 “몽땅 밑져도 할 수 없는 일이다”며 글리콜 크림을 모두 회수하기도 했다.

이 원장은 “구자경 회장님이 취임한 뒤 고객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는데 회의장에 가면 최고 상석에 고객의 자리가 마련돼 있었고, 결재 판에도 고객의 사인이 들어갈 칸이 있었다”며 그의 사원시절을 회고했다.

LG그룹의 ‘인재경영’은 남다르다. 연암은 1953년 서울사무소 개소 준비를 하면서 “모든 일은 사람에 의해 성패가 갈리는 만큼, 사람을 잘 써야 한다. 깊은 생각 없이 사람을 채용했다가 마땅치 않다고 해서 잘라내고 하는 식은 바른 용병술이 아니다”고 밝혔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편을 잡다가 부친의 요청으로 경영자로 복귀한 구자경 회장이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드리웠던 시절, 구본무 회장이 “사정이 어렵다고 함부로 사람을 내보내거나 안 뽑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등 대를 이은 ‘인간존중’은 지금까지 재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원장은 이날 2018년 급작스럽게 타계했던 구본무 회장의 집념과 승부사 기질을 소개했다. 

구 회장은 90년대 초반 국내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차전지 사업에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성과는커녕 매년 적자를 기록했다. 급기야 2005년 2000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하는 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모두가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구 회장은 “끈질기게 하다 보면 꼭 성과가 나올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라고 다시 한 번 임직원들을 다독이기도 했다.

이렇듯 LG화학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국내 최초로 리튬이온 배터리를 개발한 데 이어 중대형 배터리 분야를 적극 개척해 현재 ‘전기차 배터리 제조 경쟁력 평가’와 ‘에너지저장장치(ESS) 제조 경쟁력 평가’ 등 중대형 이차전지 사업을 세계 최고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런 성과를 기반으로 2020년 12월 LG화학은 물적 분할을 거쳐 글로벌 에너지기업 ‘LG에너지솔루션’을 분가시켰다. 이 원장은 “LG그룹은 향후 성장 동력으로 선택과 집중을 통해 AI(인공지능), Bio(바이오), CleanTech(클린테크)사업을 강화하겠다”는 말로 이날의 강연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