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기업가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①- GS칼텍스

“한국 GDP(국내 총생산량)의 40%가 넘는 매출을 진주출신 기업가들이 올린다. 그래서 진주를 ‘100년 기적의 도시’라고 불린다. 세계 경영학자들이 인구 36만 명에 불과 한 진주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정영수 진주K-기업가정신재단 이사장)

지난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간 진주시 능력개발관에서 전국의 대학생과 진주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주K-기업가정신 청년포럼’이 개최됐다. 진주K-기업가정신재단과 매일경제가 주최한 이번 행사는 첫째 날 진주가 배출한 국내 4대그룹(삼성, LG, GS, 효성) 창업주들의 생가방문에 이어 둘째 날 기업가정신에 대한 강연이 펼쳐졌다. 김기태 GS칼텍스 고문, 박승희 삼성전자 사장, 이명관 LG인화원장, 손현식 효성TNS사장이 연사로 나섰다. 본지는 이날의 강연 내용을 4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애민정신 그리고 구국운동

김해 허 씨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35대 자손인 허염을 시조로 한다. 지금으로부터 550여년 전인 1400년대 중반 허염의 11손인 허문손이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로 이주하면서 허씨가문이 시작된다. 이들이 처음부터 부자였던 것은 아니다. 승산마을로 이주한지 400여년이 지난 1800년대 후반 지신정(止愼亭) 허준(許駿·1844~1932년)선생 때 근검절약을 통해 재산을 모아 천석꾼에 이어 만석꾼 소리를 듣게 된다. 허준 선생의 호가 지신(止愼), 즉 ‘부가 쌓이면 멈출 때를 알고, 스스로 삼갈 줄을 아는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GS그룹의 뿌리인 허씨 가문의 부자정신은 ‘K기업가정신의 교과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김기태 GS칼텍스 고문은 이날 강연에서 “허씨가문의 부자정신은 남명 조식선생의 경의사상과 허준의 부자정신이 결합돼 ‘K기업가정신’이 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애민정신 ‣구국정신 ‣민족교육 ‣사업보국 ‣불살지덕(不殺之德) 등 5개 카테고리로 분류해 허씨 가문의 부자정신을 소개했다.

그는 “지신 허준 선생은 1920년 허씨의장비(許氏義莊碑)라는 비석을 세우고 허씨의장헌장(許氏義莊憲章)을 남겼다”며 “후손들 간 재산을 나누는데 다툼이 있고 이웃을 소홀히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종의 유언을 했다“고 밝혔다. 의장비에는 ‘일곱 딸에게 20마지기씩 총 140마지기를, 조상의 묘지기 자본으로 140마지기 외에 70마지기는 8촌 이내 빈곤한 친척에게 주고, 120마지기는 문중의 의장자금으로 한다. 500마지기는 진주일신학당(현 진주여고)에 의연금으로 내고, 7000원은 궁핍한 자를 돕는 의연금으로 내놓는다’라고 적혀 있다. 허씨의장헌장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대한 구휼과 60세 이상 된 노인의 양로에 대해서도 언급돼 있다.

1920년대는 그야말로 신분계급의 벽이 높았던 시기다. 허준 선생의 첫째 아들인 효주 허만정 선생은 당시 진주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철폐를 위한 ‘조선형평운동’이 일어나자 여기에도 적극 가담하는 등 불의에 항거했다고 한다. 당시 농촌에는 겨울철 일감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농번기 때 품삯으로 받은 돈이나 재물을 농한기인 겨울철에 노름으로 탕진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허준 선생의 둘째 아들인 허만진은 아이디어를 내 민심을 사로잡았다.

김 고문은 “허만진 선생은 겨울철 빈둥빈둥 놀고만 지내는 마을 사람들에게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방어산 돌을 집 앞마당에 갖다 놓으면 재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이것이 마치 금강산 1만2000봉과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며 “일방적 시혜가 아닌, 노동의 신성함과 상대를 배려하고자 하는 허씨 가문의 애민정신이 녹아있다”고 설명했다.

대를 이은 교육사업

허씨 집안의 구국운동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빼 놓을 수 없다. 권란 허국주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사재를 털어 의병 700명을 이끌고 진주성대첩에 직접 참가했으며, 그의 손자인 허동립 장군도 병자호란 때 병마사로 제수돼 전공을 세웠다. 허준 선생은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남해 충렬사 건립에도 힘을 보탰다.

김 고문은 “허만정 선생은 1914년 안희재 선생과 함께 백상상회와 백산무역이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상해 임시정부 독립자금을 조달하는데 앞장섰다”며 “조상대대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구국운동에 앞장서는 등 부자정신의 전형을 보여줬다”고 밝혔다. 허씨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허씨 가문의 이런 정신은 100년 대계인 민족중흥의 교육사업으로 이어진다. 허씨 가문은 초등학교는 물론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사재를 털어 학교 건립에 전력을 다했다. 허복 선생은 지수초등학교 건립의 부지를 희사했고, 그의 아들인 허병호 선생은 선대가 남긴 옥봉정(玉峰亭)을 개수하여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훗날 인근의 반성중학교와 합병된다. 허만정 선생은 3.1독립운동을 목격 한 뒤 부친인 허준 선생에게 학교 설립을 건립 제안했다. 당시 부친은 “우리는 독립을 준비해야 한다. 함안 소재 땅 700석지기를 제공하겠다”며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만들어진 학교가 바로 진주일신여자고등학교(현 진주여자고등학교)다. 허씨 가문은 당초 남자고등학교 설립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일제가 허락하지 않아 부득불 여자고등학교로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는 해방전후와 한국전쟁 당시 좌우익간 이념갈등이 극심했다. 당시 전국적으로 살생이 적지 않았다. 부자동네가 우선 타깃이 되었는데 지수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방직후 마을 청년들이 친일 성향의 지수면장을 죽이겠다고 죽창을 들고 일어섰다.

김 고문은 “허만정 선생은 면장을 죽이기 전에 나부터 죽이라고 온 몸으로 막았다”며 “평소 이웃에게 베풀고 나누는 애민정신이 청년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허만정 선생의 도덕적 카리스마가 성난 민심을 잠재울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이유로 지수면에는 단 한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동행 그리고 이별

1920년 허씨 가문의 허을수가 옆집에 사는 LG창업주 구인회와 혼인을 하면서 사돈지간이 된다. 이후 8건의 겹사돈이 맺어진다. 연암 구인회는 결혼 후 처남들과 함께 1931년 진주 중앙시장에서 포목점인 ‘구인회상점’을 열었다. 당시 상당한 수익을 얻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구인회는 1947년 부산에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그러자 사돈인 허만정은 자신이 가진 재산의 3분의1을 투자한다. 대신 허만정의 3남 허준구를 경영수업에 참여시킨 것이 전부다. 그는 허준구에게 “나서지 말고 처신을 잘해서 돕는 일에만 충실하라”며 순응과 겸손의 미덕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아름다운 동행은 57년간 이어졌다.

2005년 LG그룹에서 계열분리 된 뒤 GS그룹으로 첫발을 내딛으면서 동업은 종지부를 찍고 이때부터 아름다운 이별로 각자의 시대를 열고 있다. 당시 언론은 물론 세계 경영학계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성공사례라고 꼽는 등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름다운 동행의 성공요인으로 김 고문은 ‣합리적 원칙에 바탕을 둔 인화 ‣유교적 가풍의 엄격한 위계질서 ‣57년간 지켜온 양가 지분율(65:35) 및 양가의 역할 분담 ‣오너 가족이라도 철저한 능력검증을 거쳐 경영자로 육성하는 시스템을 꼽았다.

GS그룹이 출범할 당시 15개의 계열사의 매출은 자산 19조 매출 23조 규모였다. 그러나 2023년 현재 자산은 82조, 매출 94조, 계열사는 95개로 국내 재계 순위 8위, 포춘지 선정 글로벌기업 322위를 달리고 있다. GS그룹의 성장 동력에 대해 김 고문은 “자원과 에너지를 아끼면서 유해물질 배출을 줄이고 빅데이터나 AI기술, 그리고 바이오 기술을 혁신하는 등 지속가능한 성장 동력 확보가 그 핵심이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협력과 화합의 부자정신을 계승해서 사업을 독식하지 않고 협력사와 벤처, 외부 파트너와의 사업생태계 확장에 앞장서겠다”며 “고객과 이웃, 심지어 시장과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그룹의 가치다”는 말로 강연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