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 털어 중소기업기술이전 사업전개
기술패권 위한 동북아공동체 건설 주창

박태준이 한국경제와 포스코에 남긴 족적과 울림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이런 포스코와 박태준 뒤에 재일동포 고(故) 김철우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몰려 철창신세를 져야 했고 결국, 극단적인 시도까지 했다. ‘포스코 10년사’에도 김 박사에 관한 기록마저 사라졌다. 그런 아픔을 안고 재심을 청구, 무죄판결을 받아낸 고 김철우 박사.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돌을 던진 가해자들을 ‘화해’와 ‘용서’로 모든 아픔을 씻어냈다. 본지는 김철우 박사가 남긴 족적을 3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포항제철아 았게 한 숨은 공로자 김철우 박사
포항제철이 있게 한 숨은 공로자 김철우 박사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기술입국 통한 남다른 중소기업 사랑

포스코가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하는데 김철우 박사의 공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는 평생 대기업에서 근무했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대기업정책에 대해서는 적잖은 비판을 했다. 대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언제까지 우위를 점하고 있겠느냐는 우려와 일부 대기업에 쏠리고 있는 부(富)의 집중은 결국 국민 대부분이 피해를 입는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즉 중소기업을 한국 경제성장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뿐 아니다. 이명박 정부 때 설립한 ‘동반성장위원회’에 대해서도 중소기업의 자유로운 성장과 발전을 위한 적절한 정책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는 포스코에서 받은 퇴직금 전액을 출연해 사단법인 ‘한국테크노마트’를 설립했다. '테크노마트'란 기술거래(Technology Market)의 줄임말로 기술이전 시장 또는 기술을 상업적으로 매매하는 장소와 행위를 말한다. 한마디로 중소기업이 필요한 기술정보의 제공과 전문인력을 중개‧알선해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일본의 앞선 기술을 국내 중소기업에게 이전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설명이다. 그는 특히 한국의 철강, 조선, 자동차, 가전, 반도체 등 모두가 처음에는 예외 없이 자체기술이 아닌 도입기술이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이런 거대한 목표를 두고 테크노마트에 열정을 바쳤으나 정부의 무관심으로 어느 날 조용히 사라졌다.

일본의 경우는 한국과 전혀 딴판이다. 동경에 본부를 두고 있는 (재)일본테크노마트는 오사카, 나고야 등 전국 15개 지역에 지역본부를 두고 활발한 기술이전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1868년 메이지 유신 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외국기술을 도입해 이를 토대로 기술을 개량해 세계적인 기술국으로 탈바꿈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본의 중소기업은 지역의 대학, 특히 국립대학과의 산학제휴를 통해 새로운 기술개발에 사활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2010년 기준 일본의 대학이 민간기업에게서 지원받은 공동연구비가 314억엔(건수로 1만5544건), 수탁 연구비는 98억엔(건수로 6056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 박사는 살아생전 한 강연회에서 일본 사람들과 사업상 이야기할 때 유념해야할 것들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일본 사람들은 오랫동안 봉건시대를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며 “‘혼내(本音)’와 ‘타테마에(建前)’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사업을 할 때는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김 박사는 대덕연구개발특구 고문을 맡고 있으면서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NAICA)를 만들어 초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故 김철우 박사를 추모하는 제75회 철강기술 심포지엄이 2014년 2월20일 서울 포스코센터 서관 4층 아트홀에서 열렸다. 당시 권오준 차기회장이 한국 철강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고인을 추모하며 인사말을 하고 있다.
故 김철우 박사를 추모하는 제75회 철강기술 심포지엄이 2014년 2월20일 서울 포스코센터 서관 4층 아트홀에서 열렸다. 당시 권오준 차기회장이 한국 철강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고인을 추모하며 인사말을 하고 있다.

동북아경제공동체 통한 평화주의자 김철우

2013년 2월15일 김 박사는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NAICA) 명의로 ‘새 정부의 산업, 경제 활성화를 위한 제언-중소기업의 한일기술교류‧협력 강화를 위한 시책’이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그는 이날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이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독자적인 기술혁신을 통해 경영하는 것이 국가경제에 발전이 된다”며 “이를 위해 국내 대학‧전문대학과의 산학제휴 컨소시엄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 박사는 한중일 3국의 무역, 투자, 기술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동북아지역의 경제공동체 구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2010년 대전에서 열린 대덕한일포럼에서 그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진 이후 양국은 정치·경제적으로, 지정학적으로도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며 “역사적인 배경을 안고 있는 유럽도 EU 공동체를 만든 만큼 한국과 일본도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교류해 나가야 한다”며 경제공동체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김 박사는 한국과 일본은 2000년 이상 경제‧문화‧기술교류를 통해 서로 협력해 온 만큼, 상호보완 효과가 적지 않다고 판단했다.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가 펴낸 김철우박사 회고록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가 펴낸 김철우박사 회고록

김 박사는 1926년 일본 스즈오카에서 재일동포 2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꿈은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당대 세계 최고의 기술보유국인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따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재일동포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석사와 박사학위를 도쿄대학에서 받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서 김 박사는 운명적으로 도쿄대학 지도교수인 카나모리 구로우 박사를 만난다. 당시 재일동포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뒤로 하고 구로우 박사는 누구에게나 편견 없이 지도하고 지원했다. 학문적 지식 또한 출중했다. 당시 지도교수와 함께 대학원생들은 15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의 용광로에 산소를 주입하는 용융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자칫 폭발할 경우 인명피해가 예상되는 실험이었다. 비교적 안전한 곳에는 일본 학생들이, 가장 위험한 곳에는 구로우 교수가 자청해서 섰다. 이때 김 박사는 지도교수가 맡기로 한 자리를 자신이 서겠다고 설득해 성사시켰다. 그만큼 지도교수를 믿고 따랐다.

목숨을 건 이날의 실험은 사고 없이 대성공을 거두었고 도쿄대학의 전설이 되었다. 이때 구로우 교수와 김 박사가 공동으로 쓴 논문은 일본 금속철강협회 선정 최우수 논문상으로 이어진다. 김 박사가 재일동포 최초로 도쿄대학 연구교수이자 공무원이 된 배경이다. 김 박사는 한 강연회에서 “일본에서 ‘조센징’이라는 말을 들으며 온갖 멸시를 당해왔지만 죽을 만큼 공부했더니 대우가 틀려졌다”는 말로 대신했다.

김 박사가 대전에 살 때다. 일본에서 최고의 금속공학자의 길을 걸었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성실과 근면함, 남을 배려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20만원짜리 월세 방을 전전하면서도 기술개발과 관련 인사들에게는 봉급을 털어 통 큰 투자를 했다. 자신에게는 가혹하리만치 냉혹했지만 남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어느 누구 못지않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자였다. 2013년 그가 영면에 들어가기 전 후쿠오카 지하철에서 임대영 배재대학교 교수에게 남긴 말이다.

“100년 전 아시아는 참 못살았고 서로 갈등하여 전쟁도 치렀고 서구에 과학기술도 뒤떨어져 식민지 생활도 했어요. 그래서 아시아를 생각하면 못 사는 아시아, 뒤떨어진 아시아가 머리에 떠올라요. 그러나 이제는 아시아시대가 올 텐데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중국과 협력해서 잘사는 아시아, 친구도 되는 아시아, 진보하는 아시아로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까지 이 일을 하도록 하실 줄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나를 부르면 한국과 일본을 품은 대한해협이 보이는 스즈오카 언덕에 묻히고 싶어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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