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에 ‘용서’와 ‘화해’ 손길 내민 자유인
독재정권 희생양 불구 “나는 철을 사랑하네”

박태준이 한국경제와 포스코에 남긴 족적과 울림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이런 포스코와 박태준 뒤에 재일동포 고(故) 김철우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몰려 철창신세를 져야 했고 결국, 극단적인 시도까지 했다. '포스코 10년사’에도 김 박사에 관한 기록마저 사라졌다. 그런 아픔을 안고 재심을 청구, 무죄판결을 받아낸 고 김철우 박사.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돌을 던진 가해자들을 ‘화해’와 ‘용서’로 모든 아픔을 씻어냈다. 본지는 김철우 박사가 남긴 족적을 3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포항제철이 있게 한 숨은 공로자 김철우 박사
포항제철이 있게 한 숨은 공로자 김철우 박사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하얀 장미’ 통해 수치심의 감옥 벗어나

김철우는1970년부터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중공업 연구실장을 맡은데 이어 이듬해인 1971년 포스코의 간곡한 요청으로 도쿄대 교수를 휴직하고 포스코 기술담당 이사로 부임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조국의 산업화에 몸 담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김 박사는 그야말로 제철소 전체의 그림을 그리는데 몰두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일본에서 북송선을 탄지 10년이 지난 동생도 까마득하게 잊어버릴 정도였다.

어느 날, 한 낯선 사람이 김철우를 찾아와 북한에 있는 동생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무엇보다 생사라도 알고 싶었던 어머니의 바람도 적지 않았다. 김 박사는 당연히 “동생을 만나겠다”며 일본을 통해 북한을 방문한다. 당시 재일동포들의 북한방문은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북한 당국자들은 김철우에게 황해제철소 견학을 시키고 난 뒤 조언을 구했고 김 박사는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기술을 잠깐 설명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나서 김 박사는 북한 당국자에게 “동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다. 이때서야 동생을 만나게 해준다는 낯선 사람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고 그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때는 1973년 4월경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곳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박사는 영문도 모른채 보안사로 끌려갔다. 그가 북한에다 기술정보를 제공했다는 혐의였다. 당시 신문들도 김 박사가 “기간산업에 침투한 거물 간첩”이라고 보도했다. 얼마 뒤 그를 만나러 서울에 온 동생(홋카이도대학 조교수)을 포함해 4개망 간첩 11명을 보안사가 체포했다는 뉴스까지 연이어 터졌다. 재일동포 신분으로 한국의 ‘반공법’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 게 화근이 된 것이다. 두 달여가 지날 즈음 김 박사는 10년의 중형을 언도받았다. 교도소에서 김 박사는 자신의 동맥을 자르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감행했다. 당시 그의 나이 46세.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서 일본에서는 김 박사를 아끼는 지인들이 나서 한국대사관에 탄원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각 신문에 기고형식으로 “김철우 박사 형제를 구원하자”는 여론이 들불처럼 일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침묵 그 자체였다. 조국을 위해 자신을 불살랐던 재일동포 김철우는 그렇게 희생양이 됐다. 이런 가운데 김 박사는 교도소에서 성경과 독일어로 된 ‘하얀장미’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죽음을 맞닿은 환경이 되었을 때 인간은 살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누구나 악할 수 있고 연약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간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 그리고 수치심의 감옥에서 벗어났다”고 회고한다. ‘하얀장미’는 1941~1943년 나치를 상대로 정의로운 저항운동을 펴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뮌헨대학생들의 활약상을 그린 작품이다. (김철우 박사 회고록 131p/임대영)

1984년 6월 21세기 소재전시관 개관식에서 김철우 박사(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박태준 회장(다섯번째)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1984년 6월 21세기 소재전시관 개관식에서 김철우 박사(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박태준 회장(다섯번째)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포스코 고로1기 준공식도 참석 못해

때는 1973년 6월8일 오전 10시30분, 박태준 회장이 포스코1고로에 불을 붙이고 난 뒤 21시간이 지난 6월9일 오전 7시30분 마침내 검붉은 쇳물이 용광로를 타고 흘러내렸다. 박태준 회장을 비롯한 포스코 임직원들은 만세를 외치는 등 그야말로 축제의 날이었다. 그러나 정작, 영일만 모래사막의 한복판에서 가장 감격을 누려야 할 김 박사는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착공한지 3년,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세워야 한다는 구상이 나온 지 8년만이다. 이어 한달 뒤인 7월3일, 연간 강철 생산량 103만t의 포스코 1기가 준공된다.

이후 김 박사는 1979년 8월 5일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된 뒤 일본에 살고 있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감옥에 들어간지 6년 6개월만이다. 김 박사는 곧바로 도쿄대학 교수로 복직되었다. 이윽고 1980년 사면을 받아 진정한 자유인이 됐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또 다시 김 박사에게 영주귀국에 대한 러브콜을 보낸다. 이에 평소 그를 아끼던 지인들이 발끈했다. “한국에서 그런 고초를 당하고도 왜 돌아가려 하느냐”라며 그의 귀국을 극구 말렸다. 이때 김 박사는 “나는 철을 사랑하네” 한마디를 남기고 현해탄을 넘어왔다.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조국에서조차 버림받은 것도 모자라 독재정권의 희생양이 됐지만 늘 조국과 포스코를 잊지 않은 결과다. 이후 포스코에 복귀한 그는 기술고문, 기술담당 부사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철강산업의 세계적 기술발전을 위한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특히 파이넥스 공법의 기반이 되는 용융환원제선기술은 김 박사의 땀과 눈물의 결정체다. 이 기술은 현재 철강업계의 이슈가 되고 있는 수소환원제철기술의 토대가 되고 있다. 그의 공적은 손가락으로 셀 수가 없을 정도로 차고 넘친다. 스트립캐스팅(Strip Casting) 기술, 400계 스테인리스강(STS)기술, 초대형고로 설계기술, 인조흑연제조기술은 물론 코크스, 탄소섬유, 탄소섬유 강화플라스틱 복합재료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때가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는 이렇게 세계 철강기술의 중심에 서서 미래 포스코의 먹거리를 차근차근 준비했던 것이다.

최근 2차전지 산업계의 핫이슈로 부상한 전지 음극제 소재 개발에 기초를 제공하기도 했던 그는 포스코 기술연구소장으로 재임하면서 박태준 회장과 함께 포스텍(구,포항공대)과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 설립을 통해 산학연 연구개발의 기초를 세우기도 했다. 이런 김 박사의 노력으로 RIST가 세계 최고수준의 철강연구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편 김 박사는 ‘간첩혐의’로 6년 6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에 대한 재심을 청구한 끝에 2012년 11월30일 대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38년간 그를 옥죄던 사슬에서 비로소 해방된 것이다. 이런 기쁨도 잠시, 그는 무죄판결 1년만인 2013년 12월 7일 영면에 들어갔다.

강계두 전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은 “핵물리학자인 오펜하이머와 김철우 금속학 박사가 20세기 한국은 물론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건네준 공적을 대가로 저주를 받은 것처럼 두 사람 모두 이념의 사슬에 사로잡혀 일생동안 고난과 역경을 겪었으며 영면 직전에 겨우 누명을 벗게 되었다"고 밝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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