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철(鐵)박사', 김철우 10주기 추모행사 열려
‘대일청구권 자금’활용 아이디어 제공한 산업혁명의 선구자
김 박사, “가난한 조국,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박태준이 한국경제와 포스코에 남긴 족적과 울림은 아무리 과장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이런 포스코와 박태준 뒤에 재일동포 고(故) 김철우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루아침에 ‘간첩’으로 몰려 철창신세를 져야 했고 결국, 극단적인 시도까지 했다. ‘포스코 10년사’에도 김 박사에 관한 기록마저 사라졌다. 그런 아픔을 안고 재심을 청구, 무죄판결을 받아낸 고 김철우 박사. 그럼에도 그는 자신에게 돌을 던진 가해자들을 ‘화해’와 ‘용서’로 모든 아픔을 씻어냈다. 김철우 박사가 남긴 유산을 3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포항제철이 았게 한 숨은 공로자 김철우 박사
포항제철이 있게 한 숨은 공로자 김철우 박사
지난 6일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이사장 나도성)가 개최한 ‘철(鐵)박사, 김철우 박사 10주기 추모포럼’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6일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이사장 나도성)가 개최한 ‘철(鐵)박사, 김철우 박사 10주기 추모포럼’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2019년 “포항제철 건립을 정책적으로 이끈 사람은 박태준이지만, 포스코의 오늘을 과학기술적으로 이끈 인물은 김철우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한 이유를 밝혔다.

김철우, 그는 누구인가?

김철우 박사는 2013년 12월7일 영면에 들어간 뒤에서야 그동안 수면 아래에 가라앉았던 그의 실체가 평소 그를 존경하고 안타깝게 생각하던 지인들에 의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지난 6일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이사장 나도성)는 포스코센터 4층 아트홀에서 과학기술인과 철강인, 그리고 산업통상 전문가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철(鐵)박사, 김철우 박사 10주기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이와함께 ‘김철우 박사 회고록’을 발간해 배포했다.

나도성 이사장은 “고인은 103만t 규모의 포스코 제1고로의 건설을 주도하셨고 포스코를 글로벌 기업으로 이끄신 과학기술 부문의 주도적 인물이었다”며 “특히 고인은 2009년 (사)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를 창립, 초대 이사장을 맡아 한중일 3국의 무역, 투자, 기술협력을 촉진하고 동북아지역의 경제공동체 구축에 심혈을 기울여왔다”며 10주기 추모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포럼에서 양재영 유한대 명예교수와 강계두 전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이 각각 ‘강철같은 삶을 살다 간 김철우 박사의 생애와 철학’과 ‘오늘의 시점에서 본 과학기술인 김철우 박사’이란 제목으로 주제 강연을 펼쳤다. 이어 임대영 배재대학교 명예교수는 ‘김철우 박사의 삶, 생각 그리고 신앙’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다.

이날 강연자들의 공통점은 “고인이야말로 한국경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철(鐵)의 남자’요, ‘뜨겁게 조국을 사랑한 애국자’라는 평가”를 내렸다. 강계두 전 이사장은 “김 박사야말로 한국판 산업혁명의 주인공”이라며 “우리는 김 박사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밝혔다.

고 김철우 박사는 재일교포 2세로 1926년 3월9일 일본의 시스오카(靜岡)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인은 너나 할 것 없이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렸다. 특히 일본사회의 갖은 냉대와 차별에 맞서면서 도쿄공업대학(東京工業大學)과 도쿄대학(東京大學)대학원을 졸업하며 금속공학자의 길을 걸었다. 도쿄공업대학은 우리나라의 카이스트 같은 연구중심 대학교로 알려진다. 1956년 석사학위(금속제련)를 받은 뒤 고인은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 문부기관(文部技官) 연구직 겸 연구교수로 부임했다. 일본으로 귀화하지 않은 재일조선인 최초 공무원이 된 것이다. 그는 연구 교수로 재직하면서 아사히학술상(자연과학부문)과 일본철강협회 최우수 논문상, 일본금속학회 연구논문상을 수상하는 등 철강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권위자였다.

나도성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이 지난 6일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철(鐵)박사, 김철우 박사 10주기 추모포럼’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나도성 신아시아산학관협력기구 이사장이 지난 6일 포스코센터에서 열린 ‘철(鐵)박사, 김철우 박사 10주기 추모포럼’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종합제철소 건립, 재일동포를 활용하라

1950년대 중반, 한국에서도 ‘산업의 쌀’로 불리는 종합제철소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원조달에 실패하면서 답보상태를 거듭하고 있던 터에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종합제철소건립 재검토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외여건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본과 기술 부족, 그리고 쿠데타로 집권한 정부에 대한 불신 등이 겹쳐 있는 상황에서 종합제철소 건립은 그야말로 신기루 같은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한손으로는 빵을 다른 한손으로는 독재의 서슬퍼런 칼을 통해 종합제철소 건립에 불을 붙였다. 그 첫 단추가 바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었다. 박정희는 우선 재일동포 대상 ‘재일한국인 모국산업시찰단’을 모집했다. 재일동포들의 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속셈이었다. 1963년 김철우 박사가 모국산업시찰단 일원으로 생애 최초 한국을 방문하게 된 배경이다. 당시 이 일원은 대다수가 학생이었고 의사, 엔지니어, 회사원 등은 5~6명이 전부였다. 공무원은 김 박사가 유일했다. 그가 남긴 회고록이다.

“1964년 우리말을 거의 못하는 공학도로 처음 조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부산의 제일제당, 대구의 제일모직, 영월의 화력발전소 등으로 안내를 받았다. 기껏 그게 자랑거리인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 보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를 계기로 김 박사는 한국의 철강관련 기술자와 학자들 간의 인연이 본격화됐다. 이후 강원도에 있는 모 광산을 방문했다가 서울에 들어오면서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과 박충훈 상공부장관 등과 점심을 하면서 종합제철소에 대한 의견을 나누게 된다. 이때 김 박사는 자금조달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박태준에게 “한일정부가 교섭하고 있는 식민지 시대의 배상 성격을 가진 대일청구권의 무상 부문을 가능한 한 사용하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했다. 박태준도 “좋은 아이디어다”라고 화답했다.(김철우 박사 회고록 42p) 당시 김 박사의 이런 제안은 극비에 부쳐졌다. 그가 일본 정부의 국가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김 박사는 신격호 롯데 사장의 요청으로 종합제철공장 건설 사업의 계획을 논의한 바 있다.

김 박사와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의 첫 만남은 1965~1966년께 이뤄졌다.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그는 후식으로 못 보던 과일을 봤다. ‘이게 뭡니까?’ ‘이건 망고라는 과일입니다’ 이렇게 김철우와 포스코의 인연은 ‘망고’에서 시작됐다.”(포스코 뉴스룸)

‘포철1고로’는 ‘경제국보 1호’

박태준은 1968년 4월 포항종합제철이 설립된 뒤 3개월 후에 김 박사를 기술고문에 임명했다.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는 일방적인 임명이었다. 그러나 김 박사는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윤동석 토호쿠테이코쿠대학(東北帝國大學, 현 東北大學) 교수도 포항제철 전무로 발탁됐다. 윤 교수는 당시 제철이론에 관한 포스코 내 최고 권위자였다. 이들에겐 제철 분야 최고의 기술자를 포섭하는 역할이 주어졌다. 이에 재계 학계 정계를 망라, 도움을 받을 만한 인사들을 접촉했다. 대학은사까지 동원해야 했다. 후지제철 나가노 시게오 사장도 그중에 한명이다. 김 박사는 공무원 신분으로 시장조사는 물론 일본 자금과 일본 철강기술 도입을 위해 일본 통산성, 건설성, 외무성 일본철강연맹 관계자들에게 PT를 하고 다녔다. 조국을 위해 산업스파이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합제철소 건립의 가장 큰 애로는 자금이다. 박태준은 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te/對韓국제제철차단)를 자금조달 창구로 염두에 두었다. 하지만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이어 세계은행과 IMF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미국과 독일 등 차관도입도 불가능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에서 박태준은 당시 일본 재계의 거물인 미쯔미시 상아의 후지노 사장을 앞세워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갔다. 후지노로 하여금 박정희에게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는 제안을 하려던 것이었다. 어렵사리 박정희로부터 자금전용을 허가 받은 뒤 박태준은 일본 정재계를 돌며 이를 성사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쳐 훗날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인 1억1948만 달러를 종합제철소 건립의 시드머니로 활용하면서 비로소 산업화시대의 서막이 시작된다.

“그는(김철우) 포철 1고로(용광로) 설계와 공장건설을 주도하여 한국의 철강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 포항제철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연간 103만t 규모의 포철1고로를 건설함으로써 한국의 철강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높였으며 이 포철 1고로는 ‘경제국보 1호’로 불리며 한국 철강산업의 근간으로 평가받고 있다.(김철우 박사 회고록 95p/강계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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