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만 객원 편집위원(전 한서대교수)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저녁 내내 뉴스를 보다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또 TV뉴스를 켠다. 밤새 무슨 변고가 또 생기지 않았나 싶어서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생긴, 많은 사람들의 버릇이다. ‘버릇’이라기보단, 노이로제이고 트라우마다. 대명천지 21세기에 총을 든 군인들이 국회와 헌법기관에 쳐들어가는 일은 꿈이었으면 하는 악몽이었다. 그건 공포 그 이상이었다. 상식있는 시민들에겐 두려움을 넘어 시대와 세계에 대한, 암흑과도 같은 절망이었다.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권력자를 탄핵소추로 일단 멈춰세우긴 했지만, 상처 깊은 ‘쿠데타 증후군’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우린 얼마 전까지도 세계 G7+1로 꼽힐 만큼 선진 민주국가로 대접받았다. 그러나 졸지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가 되고 말았다. 폴 크루그먼이 사악한 통치술을 저격하며 인용한 ‘카키스토크러시’(Kakistocracy)가 심야에 관뚜껑을 열고 나온 것이다. 내로라 했던 민주공화정의 시민으로서 자부심은 처참하게 능멸당했다. 도대체 그런 사납고 몰이성적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국격을 파괴한 그런 반동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자질이 안된 인물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원죄라고 한탄할 수 있으나, 그 심리구조에 대한 분석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애초 12.3 사태는 최고 권력자의 비뚤어진 독선적 교조주의가 빚은 도발이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과 같은, 자명한 ‘합리적 진리’는 교조적이되, 非정치적이다. 반면에 다수가 제각기 의견을 갖고, ‘진리’의 시장에서 담론과 토론으로 파인튜닝이 된 ‘사실적 진리’는 비로소 ‘정치적’이다. 그래서다. 새삼 ‘정치’란 무엇인가 또 묻게된다. 함께 살아가며 목도하는 수많은 사실과 사건들로 공동체적 텍스처를 구성하는 것이 곧 정치다. ‘자명한 진리’가 아닌, 객관의 스펙트럼을 모은 ‘사실적 진리’의 실현이 정치 행위다. 불변의 독사(Doxa)가 아니라, 다원화된 의견과 토론을 매개변수로 한 응답이 곧 민주정치다. 현대 민주공화정의 유전자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권위적 위정자들은 그런 것과는 상극이다. 입맛에 맞는 것만 쏙쏙 빼먹는 ‘체리 피킹’(Cherry Picking)의 유혹에 빠져, 확증편향적 도그마와 망상을 신봉한다. 우리의 최고 권력자가 그랬다. 오죽하면 극단적으로 경도된 극우 유튜브를 국정의 방향타로 삼는다는 추측까지 나올까. 언론과 시민사회의 비판적 사고는 성가신 소음이나 침묵시켜야 할 ‘투정’쯤으로 여겼다. 시민 각자가 자유롭게 지혜의 선악과를 따먹는 모습 또한 불편해했다. 급기야 자신만의 ‘도덕적 분노’가 체질화되었고, 살기띤 언어로 이번 사태를 일으키고 말았다.

다행히, 너무나 다행히, 그 와중에 우린 큰 가능성을 보고 있다. 촛불집회를 넘어선, MZ세대의 응원봉 집회는 그 상징이며 ‘희망’이다. 10대, 20대 여성들이 주도하는 집회는 장엄하지도, 눅눅하거나 침울하지도 않다. 발칙할 만큼 활기차고 유쾌하다. 로제의 ‘아파트’,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투애니원의 ‘내가 제일 잘나가’, 소녀시대 ‘다만세’가 필수 플레이리스트가 되었다. 잊지 않고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기성세대와 화합하는 대견함도 보여준다. 클럽이나 콘서트장이 따로 없다. 그러나 가사 틈틈이, 흥겨운 춤사위마다 발사하는, 시국을 향한 메시지는 날카롭다. 첨단의 K팝 ‘떼창’은 눈앞에 닥친 폭력적인 다큐를 즐겁게, 그러나 묵직한 개그로 패러디하고 있다.

집회장에 내걸린 깃발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세상을 의역하고 있다. ‘TK 장녀 연합회’, ‘낡고 지친 개발자협회’, ‘집에 누워있기 연합’, ‘콘서트 가고 싶은 연맹’ 등. 하나같이 MZ 특유의 위트로 무지하고 비뚤어진 권력자의 양심을 캐묻고 있다. 성차별과 왜곡된 젠더 인식, 취업과 실업, 살벌한 경쟁사회, 소외와 배제, 능력주의에 주눅든 ‘루저’의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 누군들 누워 빈둥대는 ‘루저’가 되고싶을까. 그래도 내키진 않지만, ‘마음편히 누워있을 수 있는’ 일상마저 침해당했다며 단단히 화도 나있다. “그래서 누워있다가 뛰쳐나왔다”고 한다. 40여 년 전 ‘독재의 추억’을 되살린 당대 권력자에 대한 혹독한 힐난이요, 저항이다.

이번 사태를 부른 장본인들은 그 뜻을 알까. 하긴 알았다면 감히 ‘비상계엄’이란 망동을 저질렀을 리 없다. 애초 그와 그들은 21세기 대한민국과는 궁합이 안 맞다. ‘종북’이니 ‘반국가 세력’이니 하며, 한물 간 버전의 냉전적 사고와 非정치적 ‘진리’만을 좇을 뿐이다. 최고 권력자는 자신만의 ‘국민’과 ‘진리’의 창가에서 나라의 안위를 외롭게 걱정한답시고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 총선 참패에 각성은커녕, 선거 부정과 북한 해킹탓이라며 중앙선관위를 습격했다. 자신을 몰라주는 대중에 대한 미움이, 검사 시절 상명하복의 권위주의적 성격과 맞물리며, 파괴의 에너지로 쏟아졌다.

이에 누구보다 먼저 MZ들이 일어섰다. 교과서 속의 일이 눈앞에 펼쳐지자, 처음엔 무섭고 놀랐지만 곧 화가 치밀었다. 즉각 역사적 분노의 대열을 만들고, 광장의 맨 앞에 섰다. 기성세대는 꿈도 못꿀, 생동하는 에너지로 서슬 퍼런 기득권자들과 권력에 맞섰다. 지난 주말에도, 지금도, 그들은 에스파의 ‘넥스트 레벨’을 떼창하고 있다. 소녀시대 ‘다만세’를 부르며 다시 만날 또 다른 세계를 염원하고 있다. ‘TK 장녀’들은 봉건적 울타리 넘어, 한껏 개성을 실현하는 세상을 꿈꾸고, 고군분투에 지친 젊은 IT개발자들은 결코 지치지 않을 날을 외치고 있다. 내킬 때면 마음 편히 ‘누워있을 수 있는’ 넥스트 세상을 향해 힘차게 깃발을 흔들고 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앞날은 밝다.

키워드
#박경만 #칼럼
저작권자 © 중소기업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