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나의 꿈, 나의 인생별곡’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지독한 가난을 딛고 주경야독의 노력 끝에 연매출 1조6000억원의 중견기업을 일군 '겸손의 리더' 구자관 책임대표사원. 그는 대표이사라는 용어 대신에 수평적인 리더십을 지향하는 의미에서 '책임대표사원'이라는 직책을 사용한다.  

아이스케키 통을 메다

살을 파고드는 추운 한 겨울 밤, 열다섯 소년은 깊은 잠에 빠져 들어 있었다. 이날따라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무섭게 들려왔다. 어머니는 잠에 취해 곯아떨어진 아들의 얼굴을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밤늦게 집에 돌아와 쓰러져 잠든지 고작 서너 시간이 흘렀다. 조금 더 재우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어찌할 수 없이 어머니는 새벽 4시 반에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어머니! 나 조금만 더…”

“지금 일어나야 제 시간에 공장 갈 수 있어.”

승강이 끝에 아들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머니는 모질게 아들을 일으켜 공장으로 내보냈다. 두어 시간 걸어 공장에 도착한 아들은 아침 6시부터 꼬박 10시간가량 공장에서 걸레를 만들었다. 오후 4시쯤 그는 책가방을 들고 공장을 빠져 나와 야간학교로 달려갔다. 그래야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공장에 나가 돈을 벌지 않으면 야간학교는커녕 굶어 죽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가난은 이렇게 어린 아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공부와 꿈을 짓눌러댔다. 어머니는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진 아들을 볼 때마다 늘 죄스러웠고 종종 가슴으로 눈물을 삼키곤 했다.

“내가 평생 너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고 가슴 아팠던 것은, 그 새벽에 너를 깨우는 일이었다, 그것이 내 평생에서 가장 힘들었고, 그래서 많이 아팠다.”

그는 1944년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해방 이후 전쟁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지만 언젠가 부터 ‘가난’의 아픔만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 이후 양계장을 하다가 실패한 뒤 고무공장을 차렸지만 모두 실패했다. 일곱 남매는 외갓집과 고모집 등 친척집으로 흩어져 동생과 누나는 남의 집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그럼에도 자전거에 자신의 몸무게 몇 배나 되는 자재를 싣고서 영등포 공장과 미아리 공장을 오가며 아버지 일을 도왔다. 이렇다보니 학교를 가지 못하는 날이 태반이었다.

그는 1958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동갑내기인 외사촌 다섯 형제들도 같은 날 졸업을 했다. 졸업식장에서 그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졸업생 모두가 받는 졸업장을 받지 못한 것.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월사금(月謝金)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며칠 뒤 그는 사촌들이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입학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이날 이후 그는 낡아빠진 군복을 걸친 채 메밀묵 아이스케키 통을 어깨에 멨다. ‘메미일~묵’하고 외치는 앳된 목소리가 청계천과 미아리 골목으로 빨려 들어갔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들려오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이다.

그는 추운 겨울을 보내고 난 뒤 봄이 오면 메밀묵 통을 구두통으로 개조해 거리로 나섰다. 여름에는 또 다시 구두통을 아이스케키 통으로 바꿔서 ‘아이스 께에~끼이~’하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볐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잿더미 속에서 누가 아이스케키를 사 먹을 것이며 누가 한가하게 구두를 닦는단 말인가. 그렇게 푸념을 하면서도 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구 대표는 그렇게 계절이 바뀔 때마다 통을 바꿔가며 가난과 싸우고 자신과 씨름했다. 그럼에도 공부에 대한 갈증은 더욱 강해졌다. 정릉천 변에 한 교통경찰관이 세운 천막학교를 다녔다. 일명 야학이다. 그는 서울대를 다니는 야학 선생님에게서 영어를 배우고 산수를 깨쳤다고 회고했다.

어두운 밤길에서 희망을 만들다

1960년 어느 날 밤, 구 대표는 행상에서 돌아온 어머니에게 학교를 가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당시 외갓집 동갑내기들은 모두 고등학생이 되니 그럴 만도 했다. 어머니의 가슴 속은 시커멓게 타고도 남았다. 우여곡절 끝에 구 대표는 동대문동에 있는 용문고등학교(당시 강문고등학교)에 들어간다. 당시 야간반은 중학교 졸업장이 없어도 월사금만 있으면 입학할 수 있었다. 미아리에서 돈암동까지는 걸어서 두어 시간 가량. 그는 돈암동에 있는 걸레공장에 다녔다. 개천 둑에 임시로 지어진 걸레공장은 지독한 냄새로 코를 찌르곤 했다. 출근 첫날부터 사단이 났다. 공장주인이 구 대표의 따귀를 올려붙이기도 하였고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구 대표를 나무라곤 하였다. 다른 직공보다 이른 시간인 오후 4시 퇴근하는 그의 뒤통수는 늘 간지러웠다. 몇몇 직원들마저 “이런 형편에 뭔 공부냐”며 안타까워했다. 이럴 때마다 그는 더욱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두세 살 위 여공들이 풀이 죽은 구 대표를 종종 위로해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 버스비가 아까웠지만 버스를 타야만 지각을 면할 수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학교에서 집까지 50여 킬로미터를 걸었다. 집에서 공장, 학교에서 집까지 한 달간 걸어 다니면 버스비 500원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 돈을 아껴 부모님 몰래 단테의 <신곡>을 비롯해 괴테의 <파우스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을 사서 읽으며 희망의 사다리를 만들어갔다. 걷는 시간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영어단어장을 손에 꽉 쥐고 새벽과 어두운 밤길을 외롭게 걸어 다녔다.

“책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습니다. 한 권 한 권 사서 읽다보니 3년 동안 36권을 모을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공부가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1963년 그는 생애 처음으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꿈만 같았다. 공장에서 갖은 설움을 딛고 받아낸 보증수표가 아니던가. 하지만 금쪽같은 졸업장을 받으면 뭐든 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가 할 일이라곤 공장에서 걸레와 빗자루를 만드는 일이 전부일 정도로 취직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4.19혁명과 5.16군사 쿠데타가 터지면서 정세는 불안하고 미래 또한 어두웠다. 그래서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에 입대를 했다. 그가 복무한 곳은 강원도 원통 11사단이다. 1968년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그가 살던 집에는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고 아버지가 하던 청소용 솔 공장은 도산 직전이었다. 구 대표는 팔을 걷어 부치고 아버지 사업을 거들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무학이었던 어머니는 무척이나 현명한 분이었다. 당시 대다수가 문맹이었지만 어머니는 한문과 한글을 읽고 쓸 줄 알만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꿰뚫고 있었다.   <계속>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책임대표사원’ 주요 이력

<학력 및 경력>

▲용문고등학교, 용인대학교 경찰행정학과 졸업 ▲서강대학교 경제학 석사 ▲제5대 도산아카데미 이사장(2020) ▲한국건축물유지관리협회 회장(2019)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11대 회장(2014) ▲한국경비협회 13대 회장(2003)

<수상>

▲대한민국 창조경영인상(2013) ▲신지식인 경영대상(2011) ▲국민훈장 동백장(2007) ▲전경련 국제경영원 최우수경영인상(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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