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시대의 거인 김희수를 만나다'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김희수 이사장이 '문화입국'을 목표로 2009년 설립한 수림문화재단(조감도). 서울 동대문구 홍릉숲 인근에 있다.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검은 세력에 승리하다

신 교수는 2년에 걸친 김 이사장의 투병생활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이사장의 장례를 마치고 그는 한달음에 경남 마산에 살고 있는 김 이사장의 친구이자 한 때 중앙대 이사로 활동했던 홍인석 향교장을 찾아갔다. 신 교수는 이날 김 이사장이 살아생전, 자신에게 맡긴 전 재산을 친인척들에게 모두 돌려주겠다고 통보했다. 향교장은 얼굴을 붉히며 노발대발했다. 그는 “김희수가 중앙대를 인수하고 잘 나갈 때는 수많은 친인척들이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정작 김희수가 힘들어할 때는 모두가 도망을 갔다”며 “하물며 김희수가 투병생활을 할 때 누가 병상을 지켰느냐”며 극구 재산 이양을 말렸다. 신 교수는 이렇게 향교장을 설득했다.

“향교장님! 저의 결정을 두고 하늘에 계신 이사장님께서 지금은 노여워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훗날 저의 선택을 인정해 주실 겁니다. 이사장님의 재산이 저 앞으로 남겨졌다는 사실이 언젠가는 밝혀지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이사장님에 대한 가족들의 원망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저의 결정을 받아주시고 도와주십시오.”

향교장은 한참 만에 “그래, 김희수가 사람 하나는 잘 봤구먼”하고 신 교수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 이사장이 신 교수에게 맡긴 재산은 경남 마산시 무학산 소재의 땅 13만8000여 평과 용산국제업무단지 내 280여 평의 금싸라기 땅이었다. 현재 자산 가치로 따지면 수백억 원은 족히 넘는 금액이다. 신 교수가 김 이사장과 함께 한 28년. 신 교수는 김희수의 한쪽 날개가 되어 하늘을 날 수 있도록 자신을 바쳤지만 억울한 일도 수없이 겪었다. 특히 중앙대와 일본의 학원에 대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면서 더욱 거센 도전을 받았다. 신 교수를 향한 검은 세력들의 분노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검은 세력이란 중앙대 매각에 깊숙이 관여한 박**씨와 김희수의 먼 인척 일부다. 그들은 1200억원이 투입된 수림문화재단과 장학재단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심보로 집요하게 신 교수를 흔들었다. 신 교수 역시 김 이사장처럼 한일 양국의 국세청에 고발당하고 배임과 횡령 등의 혐의로 소송까지 당했다. 신 교수가 근무하는 고쿠시칸대에서는 “만약에 단 한 건이라도 물의가 될 만한 사안이 나오면 각오하라”는 경고까지 떨어졌다. 2년 간 매달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들어와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너무 억울해 한밤중에 아파트 옥상까지 올라갔다는 그의 회고다. 하지만 고난도 때로는 약이 되는 법.

신 교수는 83년 유학을 가서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3종 일기를 썼다고 한다. 재판부에 다이어리와 일기, 메모 등을 제출한 것이 무혐의를 받아낸 결정적인 배경이다.

수림문화재단이 신인작가 발굴을 목적으로 2013년부터 제정, 운영하는 수림문학상 제1회 시상식에서 신경호 교수(맨 오른쪽)와 박범신 작가(오른쪽에서 두번째) 등 관계자들이 수상자와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수림문화재단이 신인작가 발굴을 목적으로 2013년부터 제정, 운영하는 수림문학상 제1회 시상식에서 신경호 교수(맨 오른쪽)와 박범신 작가(오른쪽에서 두번째) 등 관계자들이 수상자와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고난과 영광이 얼버무려지다

대학교수 직분에 금정학원의 실질적인 경영자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가정은 한때 배고픔과 초라함 그 자체였다. 당시 두 칸짜리 임대아파트에서 다섯 식구(현재는 6명)가 우글우글 대면서 살았다. 이렇다 보니 그의 아내가 파출부는 물론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근이 살림을 꾸려나간다는 소문이 김 이사장의 귀에 들어갔다.

“신군은 사나이 중에 사나이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울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 나한테는 이야기 해다오.”

어느 날 김 이사장이 신 교수를 불러 “이 돈은 내가 알아서 주는 거다. 지출내역이 필요하니 영수증만 하나 써 다오. 이자도 없는 돈이다”며 3000만엔(한화 3억원)을 건넸다. 아이들이 많으니 집을 넓히라는 그의 배려였다. 이게 화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김 이사장이 타계한 후 그의 자녀 중 한 명이 유품을 정리하다 우연하게 영수증을 발견하자 곧바로 신 교수를 상대로 소송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신 교수의 아파트에 빨간딱지가 붙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연 16%의 이자에다 원금을 포함해 6억 원이 넘는 돈을 갚기까지 수년이 걸리기도 했다. 신 교수는 김 희수 이사장과 함께 한 격정의 세월은 영광과 기쁨, 그리고 아픔과 눈물이 얼버무려진 ‘고난의 시기’라고 말한다. 그나마 김희수의 정신을 이어가게 된 것이 그의 가장 큰 보람이라고 했다. 살아서는 조국의 인재양성을 위해 철새가 되어 현해탄을 넘나들었고, 죽어서는 세상을 밝히는 하늘의 별이 된 김희수 이사장. 그가 뿌린 씨앗들은 신 교수의 정성과 손길이 보태져 꽃을 피우고 들판을 물들이고 있다. 신 교수는 김희수 이사장이 ‘문화입국’을 목표로 설립한 수림문화재단 설립 당시부터 이사로 재직하면서 문화예술 분야 인재양성과 소외계층에 대한 문화격차 해소, 한일문화 교류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왔다. 대표적인 사업이 수림문학상과 수림뉴웨이브상, 수림미술상 제정이다.

아울러 그는 고쿠시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정치와 경제, 문화, 역사 등에 걸친 인재 육성에 진력하고 있다. 특히 해외어학연수 프로그램 등을 통해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역사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한일양국의 등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올해가 김희수 이사장 타계 10주년이다. 앞으로 10년 후 수림이 뿌린 씨앗이 들판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신 교수의 머릿속이 벌써 궁금해질 뿐이다.   <끝>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주요 이력

<학력 및 경력>

▲일본대학 대학원 졸업(국제관계학 박사/2004) ▲일본대학 법학부 정치경제학과 졸업(1988) ▲일본대학 한국유학생회 회장(1985) ▲한국일본근대학회 회장(2012) ▲(재)수림문화재단 상임이사(2009) ▲주일한국문화원 (사)세종학당 학장‧이사장(2009) ▲고쿠시칸대 21세기 아시아학과 정교수(2007) ▲가나이(金井)학원 이사장 겸 교장(2003) 

<수상경력>

▲장보고 어워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2019) ▲제569돌 한국발전유공자 국무총리 표창(2015) ▲한일문화대상(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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