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시대의 거인 김희수를 만나다'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김희수 이사장이 중앙대를 인수한 이듬해 설립한 도쿄의 수림외어전문학교. 신경호 교수가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를 총괄하는 금정학원 이사장 겸 학교장을 맡고 있다.
김희수 이사장이 중앙대를 인수한 이듬해인 1988년 설립한 도쿄의 수림외어전문학교. 신경호 교수가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를 총괄하는 금정학원 이사장 겸 학교장을 맡고 있다.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수렁에 빠진 수림외어전문학교

중앙대를 인수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일본 경제도 버블이 본격화되면서 모든 부동산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대출금리가 하루아침에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로 인해 이자 감당도 못하는 극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에서는 IMF 외환위기라는 복병이 터졌다. 그럼에도 김 이사장은 곶감 빼먹듯이 일본의 자산을 처분해 중앙대에 투입했다. 그러던 터에 일본 정부는 김 이사장이 “국부유출을 했다”며 감시망을 좁혀오는 등 불길한 징조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이런 가운데 중앙대의 젖줄 역할을 하던 금정상호신용금고에서 500억원대의 부당대출과 횡령사고가 터지면서 김 이사장은 결정타를 맞았다.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신 교수는 김 이사장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돌아오는 날 매번 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언젠가부터 김 이사장에게서 와인냄새가 났다. 평소 와인을 입에 댄 적이 없던 이사장이 아닌가. 신 교수는 김 이사장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여쭈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고 한숨만 푹푹 쉬고 계셔서 너무 답답했다”고 회고한다. 중앙대 인수 이듬해 개교한 일본의 수림외어전문학교도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일본에 유학중인 학생들이 대거 보따리를 싸고 한국과 중국 등지로 귀국해버렸기 때문이다. 남은 유학생은 20여 명 남짓. 신 교수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중앙대를 찾아갔다. 당시 실세로 군림하던 박범훈 중앙대 처장과 김희수 이사장을 만나 일본수림외어전문학교 정상화를 위해 머리를 맞댔다. 하지만 박 처장은 시큰둥했다. 오히려 수림외어전문학교를 비롯해 김희수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등 생떼를 썼다. 그러나 일본 내 그의 재산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신 교수는 “학교설립 당시 땅 매입대금과 임직원 퇴직금을 지급하려면 3억5000만엔(한화 35억원)을 내야 하는데 그럴만한 돈이 없다”며 “수림외어전문학교를 폐교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고 맞섰다. 특히 수림외어전문학교는 김 이사장의 정체성이며 재일동포사회에 미칠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자리에서 신 교수는 2+2 캠퍼스를 제안했다.

“중앙대 흑석동 캠퍼스에는 일문학과가 있고, 안성캠퍼스에는 일본어학과가 있습니다. 이곳 학생들에게 2년간은 중앙대에서 공부하게 하고 나머지 2년은 일본 수림외어전문학교에 위성 캠퍼스를 열어 공부를 하게 하면 수림외어전문학교는 다시 재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대학들은 미국 등지에 위성 캠퍼스를 열어 글로벌 시대를 주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 교수의 제안에 김 이사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박 처장은 “생각은 좋으나 인허가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검토는 해보겠다”며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도쿄로 돌아간 신 교수는 박 처장의 처분을 기다렸지만 끝내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다급한 신 교수가 박 처장에게 전화를 걸자 대뜸 “신 선생! 왜 당신은 이사장을 꼬드겨 일을 만들려고 하십니까. 교육부가 글로벌 캠퍼스를 허가하겠습니까”라고 몰아세웠다. 당시 한국사정에 어두운 김 이사장을 수중에 넣고 허수아비로 만들겠다는 박 처장의 심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급한 신 교수는 통역 한 명만을 대동한 채 중국으로 넘어갔다.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신 교수는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등 조선족 자치주를 비롯해 중국의 오지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니며 유학생들을 모집했다. 하물며 베트남의 호치민과 하노이까지 쫓아다녔다. 이 과정에서 신 교수는 세 번에 걸쳐 대상포진에 걸리는 등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신은 그를 외면하지 않았다. 재기불능의 수림외어전문학교가 부활하기 시작했다. 발로 뛰어다닌 지 3년 만에 700여명의 정원을 채웠다. 신 교수의 용기와 집요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때부터 학교 빚도 갚아가면서 김 이사장에게 용돈을 쥐어줄 수 있는 상황으로 반전됐다. 그야말로 땀과 눈물의 결정체였다. 당시 신 교수는 고쿠시칸대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누구든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김 이사장을 찾아갔다.

“이사장님! 이제 학교도 정상화 됐으니 저는 떠나겠습니다. 고쿠시칸대에서 1년을 못 버틸 수도 있지만 만약 거기서 살아남는다면 서울에 가서 강의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사장님께서 저를 크게 쓰시겠다고 하셨으니 보내 주십시오.”

김 이사장은 “자네가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학교도 정상궤도에 올라가는데 무슨 이야기인가”라며 “신군이 없으면 이 학교의 미래는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로 추락할 수 있다”고 버럭 화를 냈다. 결국 신 교수는 수림외어전문학교 안방살림까지 떠맡아야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학교경영을 주도해 나간 신 교수는 2001년 기숙사가 딸린 수림일본어학교를 성공적으로 설립해 안정 기반을 닦으면서 경영자로서도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2005년 신 교수는 수림외어전문학교와 수림일본어학교를 총괄하는 금정학원 이사장과 학교장으로 공식 등극한다. 이쯤에서 신 교수는 한일 양국에서 김 이사장의 유업을 계승할 유일한 후계자로 선택된다. 이때까지 신 교수의 신변에 이상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사장에 취임하자마자 모든 예산을 공개했다. 김 이사장이 “괜찮겠나”라고 물을 때 “이사장님! 겁나는 게 있습니까. 버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김 이사장은 “니 학교니까 니 알아서 해라”고 대답했다. IMF 당시 수림외어전문학교를 폐교하려면 3억5000만엔(한화 35억원)을 내놓아야 했지만 신 교수가 학교를 살려 내면서 모든 빚을 갚은 공로였다. 이로써 신용불량자나 다름없었던 김 이사장의 어깨도 한층 가벼워졌다. 당시 김 이사장의 가족들마저 김 이사장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신용불량의 딱지가 자신들에게 미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올해 수림외어전문학교가 설립된 지 33주년이 되는 해다.

최근 들어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코로나사태 등으로 금정학원에 적지 않은 위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신 교수는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는 동물적인 감각을 통해 위기를 극복, 아시아 언어교육의 명문으로 수많은 글로벌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중앙대 경영에서 손을 떼다

중앙대 인수 21년째. 김희수 이사장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의 나이도 어느 덧 80대 중반, 숨소리도 예전 같지 않고 점점 거칠어져갔다. 그는 결국, 2007년 극비리에 중앙대를 이끌어 갈 후보 물색에 들어간다. 조건은 ‘중앙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울 수 있는 능력과 무엇보다 교육에 대한 분명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 부채가 제로인 학교를 넘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중앙대 인수 당시 교직원들 앞에서 “중앙대를 글로벌 대학으로 키우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 이사장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아내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은 누구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태어났다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죽습니다. 이런 인생길에서 예외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이것이 인생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오. 이제는 내가 물러날 때가 된 거예요.”

그는 자신의 시대는 지났고 세계로 뻗어 나가야 할 대학의 운명을 위해 새로운 리더십과 소명 의식을 가진 사람이 이끌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계속>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주요 이력

<학력 및 경력>

▲일본대학 대학원 졸업(국제관계학 박사/2004) ▲일본대학 법학부 정치경제학과 졸업(1988) ▲일본대학 한국유학생회 회장(1985) ▲한국일본근대학회 회장(2012) ▲(재)수림문화재단 상임이사(2009) ▲주일한국문화원 (사)세종학당 학장‧이사장(2009) ▲고쿠시칸대 21세기 아시아학과 정교수(2007) ▲가나이(金井)학원 이사장 겸 교장(2003) 

<수상경력>

▲장보고 어워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2019) ▲제569돌 한국발전유공자 국무총리 표창(2015) ▲한일문화대상(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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