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시대의 거인 김희수를 만나다'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신경호 교수가 설립한 도쿄 수림일본어학교 교정에 세워진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의 부조상.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때는 2008년 2월 19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일 때다. 이 전 대통령과 김희수 이사장, 박범훈 전 중앙대 총장 등이 모처에서 만났다. 이 전 대통령이 “제가 오사카에서 태어난 것을 아시죠”라고 너스레를 떨며 “중앙대를 인수할 만한 좋은 분을 소개하겠다”며 김 이사장을 부른 것이다. 4개월 후인 2008년 6월 중앙대는 두산그룹으로 넘어간다. 부채 제로인 대학을 그는 1200억원에 넘겼다. 당시 중앙대 흑석동 캠퍼스와 안성캠퍼스, 대학병원 등 관계사의 자산만도 3조5000억원. 일각에서는 거대 권력 앞에 무너졌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나돌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날 이후 건강마저 극도로 나빠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화로 멀쩡한 육신마저 무너지게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희수는 한국 사회와 대학을 너무 모른 채 자신의 진심과 열정만 믿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대학은 돈과 인맥으로 움직이는 곳이었다. 그는 이를 빨리 파악하여 한국 내 인맥을 구축하고 우군을 확보했어야 하는데…한국은 된장찌개를 먹고 관사에 머물며 전철을 타고 다니는 진정한 부자를 이해하고 알아줄 만큼 격조와 품위를 갖춘 사회가 아니었다.” <‘배워야 산다’ 中/ 유승준 저>

노치환 코리아투데이 편집장은 2018년 11월 ‘수림외어전문학교 창립 30주년기념 학술발표회’ 강사로 나서 김 이사장을 보좌했던 송(宋)모씨의 이야기를 전했다.

“이사장님을 모시고 우연하게 흑석동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캠퍼스를 빠져 나오고 있더군요. 이때 자동차가 교통신호에 걸려 잠시 멈추자 갑자기 이사장님께서 창밖을 향해 ‘박** 이노옴~나쁜 노오옴~’하고 고함을 지르셨어요.”

세간의 소문대로 정치적인 압력에 굴복했을까. 어쩌면, 중앙대를 헐값에 넘긴 것이 아니라, 빼앗겼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이런 일을 주도한 박**씨를 향해 김 이사장은 이렇게 화풀이를 한 게 전부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남을 탓하거나 욕한 적을 본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감안할 때 이때의 충격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살아생전 김희수 이사장은 “내가 빨리 신 군(신경호 교수)을 중앙대로 보냈더라면..”하고 아쉬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즉 신 교수를 한국에 보냈더라면 금정그룹과 중앙대를 재벌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뒤늦은 후회였다.

본향으로 돌아가다

김희수 이사장은 중앙대를 넘기고 2년 후인 2010년 뇌경색에 실어증까지 겹쳐 1년 8개월 동안 요양원과 서민병원을 전전하다가 2012년 1월 19일 동경의 한 작은 병원에서 향년 88세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배움과 가난, 그리고 망국의 한(恨)을 풀어내기 위해 현해탄을 넘나들던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일본 도쿄 외곽에 있는 도립 하치오지 영원 묘지로 돌아갔다. 그가 남긴 1200억원은 모조리 한국의 수림문화재단과 장학재단에 기부됐다. 도쿄의 가족들에게는 단 한 푼도 물려주지 않았다. 전 세계 한인들의 숫자가 750만명으로 추산된다. 무려 180여개 나라에서 한국의 혼을 심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가운데 수조원의 자산을 가진 한상(韓商)들이 부지기수지만 김 이사장처럼 자신의 전 재산을 모국에 기부하고 홀연히 떠난 이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 그것도 일제로부터 갖은 설움을 딛고 모은 재산을 남김없이 기부한, 그래서 더욱 값지고 빛나는 이유다. 김 이사장은 끝내 중앙대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우지 못하고 도중에 물러났지만 그럼에도 문화 사업을 통해 ‘사람을 남기겠다’는 그의 열정은 하늘의 별처럼 영롱하게 우리를 비출 것이라는데 이견이 없다.

최인호씨는 기업소설 <상도>를 펴내면서 “200년 전 실재인물 임상옥(1779~1885)은 우리나라에도 상업의 도(道)를 이룬 성인(聖人)이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며 “임상옥은 죽기 전에 자신의 재산을 모두 환원한 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재상평여수 인중직사형)’라는 유언을 남긴 최고의 거상이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즉, 평등하며 물과 같은 재물을 독점하려는 어리석은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에 의해서 비극을 맞을 것이며, 저울과 같이 바르고 정직하지 못한 재산가는 반드시 그 재물에 의해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교훈이다. 소설 속에서 임상옥은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며,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다”라며 상업의 도를 제시하고 있다. 거상 임상옥과 김희수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외적인 공간에서 부를 축적해 ‘사람을 남기는 일’을 필생의 업으로 여겼으며 말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처분해 사회에 환원하고 한줌의 재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닮아있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2017년 3월의 어느 날, 필자는 도쿄에서 70km가량 떨어진 곳에 김 이사장이 잠들어 있는 도립 하치오우지 영원(八王子靈園)으로 달려갔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벚꽃의 향기가 묘지를 감싸고 있었다. 사각형의 반듯한 땅 위에 세워진 비석들은 어림잡아 수 십 만기 이상 돼 보였다. 입구에서 5분 남짓 거리에 김가(金家)라고 쓰여진 비석이 나타났다. 반 평이 채 되지 않게 보였다. 한때 수 조원을 거머쥔 성공한 재일동포 기업가의 묘비라고는 상상조차 어려웠다. 죽어서도 청빈함과 절제를 보인 진정한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석 뒷면에는 김 전 이사장의 부모 이름과 출생 및 사망 일자가 나란히 적혀 있고 옆면에는 ‘一九八七 吉日 金熙秀 建之’라고 쓰여 있었다. 이날 필자를 안내한 신 교수는 꽃 한 다발과 소주 한 병, 그리고 카스테라 빵 한 봉지를 제단에 놓고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살아생전 유난히 카스테라 빵을 좋아했다는 그의 비석에 새겨진 ‘1987’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때가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꽃이 필 때 미리 가묘를 하고 중앙대를 인수해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겠다는 청운의 꿈을 꾸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한국(민물)에서 태어났지만 일본(바다)에서 일생을 보내다가 가장 힘이 넘칠 때 본향(민물)으로 돌아와 산란을 한 뒤 자연(죽음)으로 돌아가는 연어의 삶을 몸소 보여준 시대의 스승이자 거목이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현해탄을 건너다

김희수 이사장은 1924년 6월 19일 경남 창원군 진동면 교동리에서 일곱 남매의 넷째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무릎에서 자랐다. 할아버지가 “몰락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바깥세상을 배워야 한다”며 김희수의 부모님을 일본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김희수는 할아버지로부터 말을 배우고 천자문을 익혔으며 어렴풋이나마 자연과 인생, 더 나아가 삶의 이치도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조상대대로 물려준 토지가 있어 생활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1910년 일제의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급격하게 가세가 기울어졌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자녀들을 호랑이 굴인 일본으로 보냈다.   <계속>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주요 이력

<학력 및 경력>

▲일본대학 대학원 졸업(국제관계학 박사/2004) ▲일본대학 법학부 정치경제학과 졸업(1988) ▲일본대학 한국유학생회 회장(1985) ▲한국일본근대학회 회장(2012) ▲(재)수림문화재단 상임이사(2009) ▲주일한국문화원 (사)세종학당 학장‧이사장(2009) ▲고쿠시칸대 21세기 아시아학과 정교수(2007) ▲가나이(金井)학원 이사장 겸 교장(2003) 

<수상경력>

▲장보고 어워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2019) ▲제569돌 한국발전유공자 국무총리 표창(2015) ▲한일문화대상(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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