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시대의 거인 김희수를 만나다'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1991년 2월 서울에서 열린 신경호 교수 결혼식에서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이 주례를 서는 모습.
1991년 2월 서울에서 열린 신경호 교수 결혼식에서 김희수 전 중앙대 이사장이 주례를 서는 모습.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br>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노치환 편집장은 김희수의 친척이자 친구인 홍인석 향교장을 만나 어렵게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우리 집은 대농(大農)은 아니었지만 머슴을 둘 만큼 중농은 되었지. 내 할머니가 김희수 할머니와 자매지간이어서 늘 가난한 친정식구 끼니를 걱정했어. 머슴들에게 종종 ‘아래동네(김희수 집)에 가봐라. 밥이나 먹고 있는지 하고, 양식을 챙겨 보내곤 했지. 당시 희수네 집은 농사지을 땅도 없고 먹고살기가 막막했기에 입에 풀칠이라도 할 양으로 희수 부모님이 동경으로 간 것이지. 그렇지만 일본에서 조선인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고물 주어다 팔아 모은 돈을 보내주면 그걸로 양식을 사서 끼니를 때울 정도지. 허나 그게 몇 푼이나 되겠어. 양식이 떨어지면 희수네는 마냥 굶어야 했었지. 그러면 희수는 주린 배를 움켜잡고 처마 아래 양지바른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곤 했었지. 이역만리 부모를 그리며 굶주림으로 인한 단장의 고통을 참아가며 올올이 새겼을 배고픔의 서러움...먹고 돌아서면 배고플 나이, 고작 희멀건 죽으로 한 끼를 채우다 말고...”

김 이사장은 1933년 고향의 진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교사는 일제의 칼을 옆구리에 차고 일본말과 일본의 역사를 주로 가르쳤다. 4학년 때 즈음 그는 한국인 선생님을 만나면서 조국과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깨우치게 된다. 한국인 선생님은 칼 대신 자상함과 따뜻함으로 희수를 대했고 우리말과 우리글의 소중함을 일깨워 줬다. 그는 또한 나라를 잃고 고생하는 이유를 듣고 자랐다. 그의 평생 화두였던 ‘교육’은 어린 시절의 할아버지와 초등학교 선생님의 영향이 가장 크게 미치지 않았을까.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간 김희수. 그의 나이 열네 살 때다. 어린 그에게 일본에서의 삶 또한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참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때 그는 우유배달과 신문배달, 각종 외판원에 잡일까지 해야 했다. 조센징과 한도징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어렵게 대학공부까지 마쳤다. 그야말로 반딧불과 눈빛으로 이룬 형설지공(螢雪之功)의 삶 속에서 ‘나라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기며 고단한 청춘을 보낸다.

조국을 등질 수는 없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살길은 막막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으니 살아난 것만으로도 행운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일본경제는 최악이었다. 김희수 가족들은 한국으로 돌아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돌아간다 해도 달라질게 없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가 한국행을 거부했다. 자녀들의 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서 김희수는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일했다. 때로는 소변에서 피오줌이 섞여 나오기도 했다.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돈을 모은 그는 도쿄 시내 한복판에 금정(金井)양품점을 열었다.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여기서 상당한 돈을 벌었다.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시작했다. 1949년 동경전기대학교에 입학했다.

양품점을 운영하다보니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꿈이 있었기에 행복했다. 양품점을 친동생에게 넘기고 잠시 철강업에 뛰어들었다가 마땅치 않아 이 회사를 5000만엔에 매각한 뒤 도쿄 최대의 번화가인 긴자에 땅을 매입했다. 그러나 건물을 올릴만한 돈이 없었다. 게다가 융자도 쉽지 않았다. 철강업처럼 융자가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방인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고 있었다. 은행융자를 받을 경우, 일본인은 보증인이 한 명이면 가능했지만 한국인은 여러 명의 보증인을 세우고 담보까지 제공해야 했다. 신발이 닳아질 정도로 은행문턱을 들락거린 끝에 어렵게 융자를 얻어 금정기업주식회사 1호 건물을 올렸다. 1961년,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그렇게 시작한 부동산업은 창립 20주년인 1981년도에 건물이 13개, 창립 25주년인 1991년도에는 23개로 늘어났다. 당시만 해도 신격호‧손정의가 부럽지 않은 그야말로 재벌의 반열에 올라섰다. 70년대 두 차례에 걸쳐 터진 석유파동은 역설적이게 일본경제를 튼튼하게 만들면서 일본의 부동산은 말 그대로 눈만 뜨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정확하게 그의 자산을 파악하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도쿄의 긴자 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땅 값이 비싼 지역이다. 일부에서는 그의 재산을 30조원 정도로 예상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지만 그는 7평짜리 비좁은 방에서 비즈니스를 일으키고 40년 넘은 집기를 고집할 정도로 근검절약의 정신을 고집했다. 전철로 출퇴근을 하고 식사도 된장찌개 한 그릇이면 만족했다. 그의 집에도 흔한 파출부 한 명 두지 않았다. 유독 자신에게 만큼은 냉혹한 잣대를 들이댄 짠돌이지만 그럼에도 한국 유학생이나 젊은 일꾼들에게는 늘 따뜻함과 통 큰 배려로 조국사랑을 대신했다.

그는 사업성공의 비결로 ‘정직’과 ‘신용’을 꼽았다. 여기에 그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을 뿐더러 늘 솔직하고 당당하게 신분을 밝히며 거친 이국땅이지만 올곧게 자신의 뿌리를 내리게 했다. 도쿄전기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면서 성공하기에는 어려우니 귀화를 하라”는 지도교수의 제안도 수차례 받았지만 그는 매번 정중하게 거부했다.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조국을 등질 수 없다는 그의 소신이었다.   <계속>

 

'신경호 日고쿠시칸대 교수' 주요 이력

<학력 및 경력>

▲일본대학 대학원 졸업(국제관계학 박사/2004) ▲일본대학 법학부 정치경제학과 졸업(1988) ▲일본대학 한국유학생회 회장(1985) ▲한국일본근대학회 회장(2012) ▲(재)수림문화재단 상임이사(2009) ▲주일한국문화원 (사)세종학당 학장‧이사장(2009) ▲고쿠시칸대 21세기 아시아학과 정교수(2007) ▲가나이(金井)학원 이사장 겸 교장(2003) 

<수상경력>

▲장보고 어워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2019) ▲제569돌 한국발전유공자 국무총리 표창(2015) ▲한일문화대상(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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