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삼남매를 글로벌인재로 키운 비결'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 고문이 2009년 당시 정운찬 국무총리에게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는 모습.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 고문이 2009년 당시 정운찬 국무총리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는 모습.

졸면 죽는다

정영수 고문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해외생활 50년. 싱가포르에서만 45년여를 살았다. 해외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에게 고향은 어머니 같은 그리움과 추억의 공간이다. 이국에서 본 밤하늘의 별들도 꼭 고향의 언덕배기 산마루에서 본 그 별이 아니던가. 외롭고 힘들 때 하늘의 별을 보고 ‘고향생각’을 부르면서 이민생활의 고단함을 위로 받던 그들이다. 정 고문이 태어난 그의 고향 진주 역시, 일제가 할퀴고 간 상처에다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모두가 가난했고 하루 세 끼 챙겨먹을 수 있는 가정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누구나 예외 없이 모진 삶을 버티고 살아왔다. 그럼에도 고향은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 않는 법. 누가 뭐래도 물 좋고 인심 좋은 충절의 고향 진주는 그의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고향은 늘 살갑고 애틋했으며 고향의 일이라면 만사 제쳐 두고 팔을 걷어붙이면서 살아온 이유이기도 하다.

나를 지켜주고 튼튼하게 키워준 어머니와 같은 자랑스러운 고향, 누가 고향이라도 물을라치면

나는 미리부터 어깨가 쭉 펴지고, 가슴 속으로 따뜻한 기운이 차오름을 느낀다.

꿈에서라도 가보고 싶은 그립고 그리운 그곳.

어린 시절, 정 고문은 부친이 공무원을 하고 어머니도 시장에서 양품점을 운영했기 때문에 배를 곯지는 않았다. 또래에 비해 행운아였던 셈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달리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월남전까지 참전하고 돌아와 무역회사에 취직해 1976년 홍콩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유도 이런 어린 시절의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대기업 상사 주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1982년 싱가포르로 발령이 나 여기서 법인을 맡았다. 8년간의 봉급쟁이 생활을 마치고 1984년 비디오·오디오 테이프 판매회사를 세웠다.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일대는 물론 멀게는 미국과 영국에 이르기까지 5대양 6대주를 누볐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한 그에겐 오직 ‘졸면 죽는다’는 정신 하나뿐이었다. 사업 초창기 자동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테이프 2000개를 싣고 말레이시아로 넘어가 주말 동안 모두 팔고 돌아와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다.

1985년 한 해에는 무려 53차례에 걸쳐 말레이시아를 방문하는 등 발로 뛰면서 흘린 땀방울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주가는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상사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자본과 조직을 갖춘 일본의 경쟁회사들이 정 고문에 대한 모함과 함께 가격담합을 통해 그의 등에 비수를 꽂았다. 결국 파산직전까지 내몰렸지만 특유의 뚝심과 배짱으로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싱가포르 수출기업 마그네틱 부문 수출 1위, 내수시장 공급 1위라는 경이적인 실적을 올렸다. 1991년엔 한국에서 수출의 날 훈장인 수출산업포장을 받는다. 그것도 자체 브랜드를 통해 얻어낸 성과물이다. 물건 하나를 팔더라도 한국 상품을 팔겠다는 그의 고집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2000년대 들어 태국 등지에 3개의 현지법인을 만드는 등 사업이 확장일로를 달렸으나 2009년 사업장 일체를 정리하고 CJ그룹으로 옮긴 뒤 동남아 전역 비즈니스를 총괄하는 경영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해 “고문의 자리는 조직이나 단체에서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며 “경륜과 식견, 그리고 시간적 여유와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홍콩에서 시작해 45년여를 싱가포르에서 살아온 ‘디아스포라’이기도 한 정영수. 타국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뿌리를 내릴 때까지 기업인으로 치열한 비즈니스를 통해 달러를 벌어들여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데 힘을 보탰고, 한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민간외교관으로서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

칠순을 맞아 2017년 9월 1일 남산 힐튼호텔에서 정 고문은 아내 강안나씨와 동시에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그의 아내는 1986년 중앙일보 아주 백일장대회 성인부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17년 문학나무 신인작품상 시 부문에서 <눈부신 그늘>로 입선하면서 정식 시인으로 등단했다.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 고문과 부인 강안나 시인이 2008년 시상식 후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 고문과 부인 강안나 시인이 2018년 6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20회 국제거래신용대상 시상식에서 수상한 후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교육은 화초 키우듯이

이날 출판기념회는 해외에서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한 한 가정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엿보는 기회가 됐다. 맏딸 정세은씨가 사회를 보고 장남 정종환 CJ부사장이 가족대표로 인사를 했다. 또한 차녀인 정지은씨가 폐회식 인사를, 그의 딸인 조예인 어린이가 할아버지·할머니에게 바치는 ‘우리 함께’라는 동시를 낭송하면서 백미를 장식했다. 이날 공식 행사 말미에 한 참석자가 강 시인에게 “자녀들을 글로벌 인재로 키운 비결이 뭐냐”고 묻는 질의에 “특별함도 내세울 것도 없는 평범한 가정에서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한 것이 전부”라며 “아이들이 엄마 아빠의 생각을 잘 이해해주고 따라주는 행운이 주어졌을 뿐”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게 다일까.

어린 시절, 정 고문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양품점을 운영하다보니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오후 늦게 서야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맏아들인 정영수가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올 때면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이럴 때마다 마음 한 켠이 늘 외롭고 허전했던 기억이 나이가 들어서도 지워지지 않았다. 결혼을 하기 위해 맞선을 보는 자리에서 정 고문은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꼭 집에서 맞이해줄 것”을 청했다고 한다. 맞선 상대인 강안나씨도 예비신랑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면서 마침내 결혼에 이른다. 어린 시절의 아픈 경험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정 고문의 의지였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정영수는 그의 부모로부터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그가 다섯 살 무렵이다. 6·25 전쟁으로 가족 모두가 피난을 떠났다. 유난히 춥게 느껴졌던 그해 겨울, 그의 부모님은 아들이 혹시 추울까봐 솜옷으로 꽁꽁 감싸 몇 십리를 가면서도 따뜻한 음식을 챙겨주었고, 긴 피난길에 행여 다리가 아플까봐 업어주던 기억들이 생생하다고 그는 추억했다. 나중에 자라서 학교교육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배우면서 당시 부모님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자신을 보호하고 사랑했는지 깨달았고 그 고마움을 가슴에 아로새기며 살아왔다는 그의 설명이다. 그렇게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이지만 엄한 면도 적지 않았다.

정 고문이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의 아버지는 가훈을 만들어 벽에 걸어놓고 동생들과 함께 읽기를 권했고 마루에 꿇어 앉아 삼강오륜과 명심보감 강의를 한 시간씩 듣게 했다. 정 고문은 “당시는 고역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모진 풍파를 헤쳐 나가는데 자양분이 됐다”고 말한다. 정 고문도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의 말대로 특별하거나 색다른 교육을 시킨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정 고문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처럼 ‘호연지기’를 가훈으로 정한 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한다거나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다만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한글이야말로 한국인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큰 줄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계속>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 고문' 주요 이력

▲한상리딩CEO포럼 의장 ▲글로벌한상드림장학재단 이사장 ▲한국문인협회 회원(수필가) ▲국민훈장 모란장(2009/한국정부) ▲베트남문화훈장(2013/베트남정부) ▲자랑스런한국인대상(2017/한국언론인연합회) ▲국제거래신용대상(2018/한국중재학회) ▲저서 산문집 <멋진촌놈>, <The hub of Asia>, <70찻잔>, <밖으로 밖으로, 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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