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별이 된 나의 어머니'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김낙진 회장(왼쪽에서 두번째)의 고려대 졸업식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 가족사진.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영원한 이별’이 된 피난길

1950년 한국전쟁이 터졌다. 북한군은 단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뒤 무섭게 남하했다. 전세가 뒤집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8월 30일 충무로 ‘명고당’ 안주인은 뱃속의 아이를 품고 다섯 살과 세 살배기 어린 남매를 앞세워 광나루에 도착했다. 이미 광나루는 피난민들이 개미떼처럼 몰려 있었다. 명고당 안주인은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 둔 배에 떠밀리다시피 올라탔다. 안주인의 마음은 불길했고 발길조차 떨어지지 않았다. 강물은 배를 밀어댔고 뱃사공은 물길을 재촉했다. 명고당을 정리한 뒤 곧바로 고향으로 내려오겠다는 아버지의 약속을 믿고 고향으로 떠났다. 아버지는 멀어져 가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배는 요즘 고무보트 정도 되는 조각배나 다름없었다. 순간, 시야에서 아버지가 사라졌다. 나루터를 떠난 배는 어느덧 강남의 허름한 강가에 도달했다.

이날 배를 탄 일행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일행은 강가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어카에 옷가지와 식량자루, 밥을 지을 수 있는 그릇들을 싣고 가파른 남태령 고개를 끙끙대며 넘었다. 리어카 한켠에 안주인은 자신의 어린 남매를 태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이미 일곱 살 짜리 조카아이가 무릎을 크게 다쳐 실려 있었던 것이다. 안주인은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아들을 걸리며 피난길에 올랐다. 세 살배기 딸은 영문도 모른 체 리어카를 뒤따르다가 아빠에게 간다며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들의 목적지는 전북 고창군 고산마을. 며칠이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길을 그렇게 걸었다. 8월 하순의 늦더위는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온 몸에서 비지땀이 흘러내리고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안주인은 땀에 절어 주저앉은 아이를 달래면서 험한 산길을 넘고 물길을 건너야 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남의 집 헛간을 빌려 비를 피하고 맨밥에 소금 친 주먹밥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 어쩌다가 국밥집을 만나 한 끼 때우는 날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그렇게 18일 동안 밤낮을 걸어 안주인은 마침내 고산마을에 도착했다. 1950년 9월 16일이다.

김낙진 동원아이엔티㈜ 회장의 어머니 고(故) 최말순 여사의 피난길 이야기다. 고산은 아버지의 고향이자 시댁이 있는 동네다. 피난길의 여독이 가시기도 전에 태기(胎氣)를 느낀 어머니는 곧바로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외갓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먼 길을 걸어온 어머니는 또 다시 70리길을 걸어 복산치 친정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친정나들이가 이토록 쓸쓸하고 마음이 무거울 수가 없다. 남편을 따라 깃재를 넘어 신행을 오던 그 길인데... 지금 이순간은 너무나도 낯설고 아득하게 멀리만 느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어버리고 싶었다.”   <‘어머니의 향기’ 中/김낙진 형제 지음>

김 회장의 어머니는 1943년 약관 18세에 아버지 김재철과 결혼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명고당의 안주인이 됐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7년간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살면서 아들과 딸을 낳았고 외갓집에서 막내아들을 낳았다.

행복했던 명고당 안주인

본정통(충무로 극동빌딩 인근) 중심부에 자리 잡은 명고당은 부의 상징이자 일본인들의 자존심이었다. 당시 일본인 주인은 세계정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청년실업가 김재철에게 명고당 운영권을 급하게 넘기고 부산으로 떠났다. 명고당 주인이 김재철로 바뀌고 어머니가 안주인이 된 것이다. 콧대 높은 일본인들이 들락거리던 명고당이 한국인으로 바뀌자 사시사철 고향은 물론 전국에서 몰려든 식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하물며 소문만 믿고 찾아온 생면부지 인사들까지 차고 넘쳤다. 그만큼 명고당은 한국인의 자존심이 묻어 있는 곳이었다. 이럴 때마다 아버지는 융숭한 대접을 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며칠씩 묵다가 시골로 내려는 손님들에게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다. 고향에서 올라온 손님들을 위해 부부는 서울역(경성역)까지 직접 바래다주고 기차표에다 용돈까지 손에 쥐어 보내곤 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집안 친척들의 학비 역시 명고당 몫이었다. 하루 세끼 챙겨먹기도 힘든 시절, 이들의 훈훈한 인심과 선행은 고향으로 퍼져나가 집안 어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어쩌다가 어머니가 명고당을 찾은 손님들의 접대를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 때 그랬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명고당의 일거리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조선총독부 자리에 미군정청과 각급 행정기관들이 들어서면서 각종 인쇄물 발주와 인장 공급요청이 봇물처럼 터져 납기일을 제대로 맞출 수 없을 정도로 바빴다. 직원 수만도 20여명이 넘었다. 명고당 1층에는 사무실과 인장포, 철물점, 인쇄소가 나란히 있고 2층은 다다미방이 여러 개 딸려 있었다. 이들 부부는 종종 시간을 내 아장거리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남산을 산책하는 등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꿈과 사랑의 보금자리였던 명고당을 떠난 지 어언 16년이 지나 아버지의 혼이라도 찾아보고 싶었던 어머니는 1966년 명고당을 찾았다. 그 화려하고 따뜻했던 명고당의 흔적은커녕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에 의해 쫓겨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급히 발길을 돌렸다.

어머니는 “부부는 죽으나 사나 함께 해야 한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렸어야 했는데 명고당을 정리하고 뒤따라오겠다는 남편의 말을 순순히 따른 내 잘못이다”라고 가슴을 치면서 발걸음을 재촉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전쟁은 그렇게 단란했던 한 가정을 짓밟아버렸다.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밟아본 적이 없는 김 회장은 항간에 떠도는 아버지의 월북에 대해 “가당치 않다”고 강조했다.

“6.25당시 경복고 3학년에 다니던 사촌형은 월북을 한 뒤 북한 김책공대를 나와 화학공장에서 책임자로 근무한 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수년 전 북한의 유가족들과 남한의 친척들이 금강산에서 만났는데, 북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만약 아버지가 북한으로 끌려갔다면 아버지의 성품으로 보아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남한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을 것입니다.”

김 회장의 어머니 최말순은 전남 장성의 복산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종가집 아홉 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아홉 칸짜리 사랑채를 가진 어머니의 친정은 부농 중의 부농이었다. 당시 복산치 사람들은 외갓집 땅을 밟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위로 딸만 있는 딸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그 누구보다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시내 여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학교공부는 여기가 끝이었다. 보수적인 외할아버지가 다 큰 여자 아이를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대다수 여성들은 타지로 유학을 가거나 본가와 떨어져서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상급학교 진학을 하겠다고 떼를 쓰다가 단식투쟁까지 벌였다.

결국, 외할아버지는 사랑채에 독서당을 만들어 놓고 훈장선생님을 모셔서 딸에게 추구‧사자소학‧명심보감은 물론, 소학과 대학을 배우게 했다. 이렇듯 어머니는 배움에 대한 끈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런 습관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훗날 형님이 전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할 때 어머니를 모시고 산 적이 있었다. 이때 어머니는 전주에서 명성이 높은 서예 선생님을 찾아가 한문과 서예를 배운 뒤 전시회를 열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뽐내기도 했다. 이때 배운 어머니의 솜씨는 현재 일산의 김 회장 사무실에 걸려 있다. <계속>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주요 이력

▲광주일고,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삼진물산(주) 사우디 지사 근무 ▲한국건류환경(주) 설립 운영 ▲서울공대 최고산업과정 수료 ▲산업포장 수상(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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