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별이 된 나의 어머니'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의 어머니 고 권말순 여사의 서예작품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의 어머니 고 최말순 여사의 서예작품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김낙진의 방황과 어머니의 기도

김 회장은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하고는 담을 쌓을 정도로 놀기에만 정신이 팔렸다. 걸핏하면 친구들과 싸우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럼에도 성적은 늘 1등이었다. 벼락공부의 전형으로 불릴 만큼 순간적인 두뇌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막내아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넋두리를 하듯 늘 가슴에 피멍이 든다.”며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행여 김 회장이 상처를 받을까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었던 현명한 어머니였다. 숨 가쁘게 살아가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형님은 김 회장의 공부를 챙겼다. 그 말썽꾸러기였던 김 회장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그의 성적은 일취월장한다. 형님은 어머니에게 “낙진이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영리하다”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초등학교 담임선생님마저 김 회장을 당시 명문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어머니를 설득할 정도였다. 그러던 김 회장이 경기중학교보다 한 수 아래인 광주서중 입학시험에 낙방하는 일이 벌어졌다. 내심 수석합격을 기대했던 어머니의 상심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또 김 회장은 상처를 안고 후기인 광주 동중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서 김 회장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해 지역 일간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당시 신문에는 딱지치기 선수, 구슬치기 대장인 피난쟁이, 보기 드문 수재라는 보도가 잇달았다. 이 일을 계기로 김 회장은 중학교 1학년에서 3학년으로 월반을 했고 여세를 몰아 광주일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는 주인공이 됐다. 김 회장의 이런 영광 뒤에는 늘 아버지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형님이 있었다. 새벽녘 졸음을 쫒기 위해 형님은 먼저 수돗가로 나가 찬물에 세수를 했다. 당연히 김 회장도 형님을 따라 할 수 밖에 없게 했다. 형님은 졸고 있는 김 회장을 칠 수는 없어, 혁대를 풀어 의자등받이를 내리치면서 잠을 쫒게 했다.

그러나 온 집안의 기대와 달리 김 회장의 일탈은 광주일고에 들어가서도 계속됐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9일 동안이나 무단가출했다가 광주 충장로에서 우연하게 어머니와 마주치는 일이 생겼다. 어머니는 거지꼴이 된 아들에게 “그간 고생했겠다”라고 말하며 끌어안으면서 눈물을 잠깐 보이는가 싶더니 곧바로 식당으로 데려가 김 회장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김 회장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다. 설사병에 걸려 죽음을 넘나들고 있었다. 어머니는 축 늘어진 김 회장을 등에 업고 동네 용하다는 한약방을 모조리 훑고 다녔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한 달이 넘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모두가 포기해야 하느냐고 수군거릴 정도였다. 어머니는 교회 전도사를 불러 기도를 부탁하는가 하면 무당을 데리고 와서 치성을 드리기도 했다.

“어려서 설사병에 걸려 까칠한 보리죽만 먹은 적이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보리죽이 조금 많게 보였던지 한 수저 떠먹은 뒤 저에게 밥그릇을 건넸어요. 그걸 본 제가 밥이 적다며 잔뜩 화가 나 밥그릇을 내동댕이쳤습니다. 설사병은 죽을 많이 먹으면 안되었나 봅니다. 그 후로 어머니는 제가 보이지 않는 장독대에서 형님과 누나를 데리고 한 달 동안 몰래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나 짓겠다고 시골에서 지내던 어느 날엔 입대를 앞둔 친구 송별식을 하다가 옆 테이블에서 술을 먹고 있는 사람들과 패싸움이 벌어져 경찰서에 붙들려갔다. 김 회장은 “친구들은 죄가 없다. 내가 주먹질을 했으니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다가 유죄판결을 받았다. 재판이 끝난 후 판사(광주일고 선배)가 별도로 자신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김 회장에게 “징역형을 줄 수도 있지만 집행유예를 내린 것은 너에게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다”며 “이 길로 바로 상경하여 공부를 하라”는 충고를 했다. 김 회장은 곧바로 서울로 달려갔다. 대학 입학시험은 5개월가량 남아 있었다. 벼락치기에 남달랐던 김 회장은 죽기 살기로 공부한 끝에 고려대학교에 당당하게 입학한다. 고등학교 졸업 2년만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최재훈(현 남화토건 회장)의 동생이 저와 함께 고려대 시험을 치게 됐어요. 제가 3수를 했잖아요. 이날 오전 시험을 마치고 시험장에 오신 친구어머니와 친구 동생, 그리고 저 셋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어머니! 저는 오전 시험을 엉망으로 봤는데 그래서 오후 시험은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나 친구 어머니는 김 회장에게 “후기도 있으니 연습 삼아서 오후 시험을 보라”며 통사정을 했다. 그럼에도 김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자 친구 어머니는 김 회장의 손을 잡아당겨 시험장으로 끌려 들어가게 했다. 그런데 합격이었다. 그날 친구 어머니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했다면 김 회장의 인생이 지금 180도 달라졌을 수 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김 회장은 늘 친구 어머니에 대한 애틋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이후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를 한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직장생활을 하다가 창업해 우량 중소기업으로 키워낸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동원아이앤티㈜ 회장의 성공에는 무엇보다 김낙진 회장에 대한 어머니의 무한한 신뢰와 하루도 빼놓지 않은 어머니의 기도, 그리고 아버지를 대신 한 형님의 땀과 눈물이 있었다.  <계속>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주요 이력

▲광주일고,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삼진물산(주) 사우디 지사 근무 ▲한국건류환경(주) 설립 운영 ▲서울공대 최고산업과정 수료 ▲산업포장 수상(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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