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별이 된 나의 어머니'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의 어머니 고 최말순 여사(왼쪽에서 세번째)와 (왼쪽부터) 큰며느리(방정숙씨), 작은며느리(정영숙씨), 딸(명희씨)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가난한 자를 위한 어머니의 선행

명고당 안주인에서 하루아침에 부산댁으로 살았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는 긍정의 화신이기도 했다. 자신의 안방을 동네 아낙네들에게 내어준 것도 모자라 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손수 옷을 만들어 주기도 하면서 당신만의 특이한 경조문화를 만들었다.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낼 때 어머니는 상대방이 부자라고 생각하면 경조사비를 2만~3만원 선에서 지출한 반면, 어렵고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집에는 10만원도 아깝지 않게 내놓았다. 요즘이야 10만원은 큰돈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30~40년 전으로 돌아가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부자는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되지만 가난한 자는 나라도 도와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게 어머니의 철학이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당신의 마음을 시커멓게 멍들게 했던 김 회장에게 보상이라도 요구하듯 주문도 적지 않았다.

“얘야 뒷집 아들이 이번에 대학 들어갔다는데 어려운 모양이니 네가 도움을 줄 수 있겠니?”

“얼마를 드려야 할까요.”

“네 형편이 괜찮으면 넉넉히 주어라.”

어머니는 작은 며느리에게도 “너희 남편 한 트럭하고 큰아들(한용)과는 바꾸지 않는다. 그만큼 부족한 점이 많지만 심성은 괜찮은 편이다.”며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은 옛말이니, 남자는 여자하기에 달려있다. 이제부터는 남편을 잘 다루어 잘 살도록 하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평소에도 거짓말이라곤 전혀 입에 올리지 않는 어머니는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인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회갑 즈음, 4000여 만원이 전 재산이었다. 이 가운데 어머니는 1000만원을 뚝 떼어 교회에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당시 어머니는 당신의 큰 아들이 학비가 없어 상급학교에 제때 진학을 못한 아픔을 이렇게라도 풀고 싶었다는 말을 남겼다. 시장을 다니거나 나들이를 할 때 버스비를 절약하기 위해 서너 정거장 정도 거리는 늘 걸어다녔던 어머니는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던 반면 남에게 베풀거나 나눌 때는 아무런 조건 없이 큰돈을 지출했다. 언젠가 지방에서 사업을 하던 김 회장의 누나와 매형이 형편이 어려워지자 무일푼으로 상경한 일이 있었다. 어머니는 김 회장에게 무조건 도우라고 명령을 하다시피 했다. 김 회장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매형의 가족들이 살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해주고 일자리까지 만들어주었다.

“아버지가 결혼하기 전 고산 인근에 자신의 이름으로 사놓은 5000여 평의 야산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남긴 유일한 재산목록이지요. 자녀들 학비가 없어 진학을 포기하면서 까지도 어머니는 이 땅을 가슴속에 품고 계셨어요. 이 땅을 놓고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하셨겠습니까. 그런 땅을 어머니는 할아버지 효행비 제막식 행사에 참석한 여러 친척들 앞에서 문중에 기부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어머니는 땅을 내놓으면서 조건 하나를 붙였다. 도지의 일할을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 도지를 모두 동서들에게 나눠주었다. 어머니는 또 다른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형제들도 몰랐다. 문중에서 어머니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를 갚지 못하자 문중의 산을 대신해서 변제하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땅 역시 문중의 재산으로 돌려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집안의 사촌들이 ‘하용공(할아버지 호) 후손 모임’을 결성하여 해마다 한식 무렵에 성묘행사를 하고 있다. 이런 공로를 기려 하용공 후손들은 어머니의 일흔 다섯 번째 생일을 맞이한 자리에서 ‘장한 어머니’ 상패를 만들어 바쳤다.

청상과부로 한많은 생을 살면서 끼니를 걱정하고 아이들 학비를 걱정했던 어머니이지만 후손들을 위해 미련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 어머니가 폐암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거의 매일 병상을 찾아온 한 조카의 이야기다. 

“제가 어렸을 때 당숙모님은 저에게 배움의 끈을 놓지 않도록 항상 격려해 주시고 이끌어 주신분입니다. 늘 따뜻한 말씀과 사랑으로 감싸 주셨던 당숙모님은 내 인생의 나침판이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 무렵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병문안을 온 지인들에게 일일이 돈 봉투를 손에 쥐어주면서 그동안의 고마움과 함께 당신의 마음을 전했다.

어느 날은 어렵게 사는 집안의 조카가 딸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는데, “지금 돈을 주면 결혼자금으로 다 써버릴 테니 지금 주지 말고 결혼식이 끝난 후에 전달하여 본인을 위해 쓰도록 해라”며 김 회장에게 돈 봉투를 준 적이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김 회장은 어머니의 유지대로 결혼식이 끝난 후 그 조카에게 봉투를 건넸다.

어머니는 세 명의 손자 앞으로 현금 1억원을 별도로 남겨 주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선영도 참배하고 여행도 같이하며 집안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데 쓰도록 당부한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7년. 해마다 어머니의 기일 날 20여명이 넘는 사촌 형제들이 모여 어머니 추모식과 함께 어머니의 기부정신과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어머니의 ‘망부가(亡夫歌)’

1986년 어머니는 회갑을 맞이했다. 전쟁으로 인해 서울을 떠나온 지 꼭 36년이 되었고 아버지와 결혼한지 43년이 되는 해다. 이날 회갑연의 아버지 자리는 외할머니가 지켰다. 400명이 훨씬 넘어 보이는 친인척들과 하객들 앞에서 어머니는 <알뜰한 당신>과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결혼 첫날밤 동네사람들이 방을 빼곡히 채운 자리에서 아버지가 노래를 못한다고 발뺌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대신 해서 불렀다던 그 노래다. 이날 어머니가 부른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닌, 어머니의 한 맺힌 절규였다. 이날까지도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했다. 노래 못하는 아버지일지라도 이날만큼은 어머니를 위해 애국가 한 소절이라도 불러 주기를 바랐던 어머니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1950년 8월, 광나루에서 남편과 생이별을 한 뒤 36년의 그림자 없는 세월이 흘렀으니 어머니의 가슴속 응어리를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2004년 어느 날, 어머니는 병문안을 온 며느리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오늘 화장을 좀 이쁘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왜요 어머님!”

“내가 하늘나라에 가더라도 너희 아버지가 이렇게 세월에 가려진 내 모습을 기억해 낼까 모르겠구나. 이쁘게 해야 그나마 찾기가 쉽지 않을까? 나 또한 너희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을지 가물가물하다.”

2004년 9월 16일, 이날은 어머니가 피란을 내려오던 54년 전의 그날이다. 이날 아침 어머니는 7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하늘의 별이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굴시내 선영에 있는 아버지의 빈 유골함 곁에 잠들었다. 김 회장 후손들은 어머니의 묘비명에 이런 글을 남겼다.     

'지상에서 못다한 사랑

천국에서 이루소서

아버님, 어머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끝>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주요 이력

▲광주일고,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삼진물산(주) 사우디 지사 근무 ▲한국건류환경(주) 설립 운영 ▲서울공대 최고산업과정 수료 ▲산업포장 수상(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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