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후의 관기가 되다
루시를 등에 업고 자선활동 적극

[중소기업투데이 신미경 기자] 한국전쟁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국가 보훈처로부터 ‘6‧25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바 있는 고 현봉학 박사와 북한군의 기습에 밀려 낙동강 전선마저 위협을 받을 당시 한국 해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최후의 관기(官妓)가 된 배우 고 윤인자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주가 6.25전쟁 기념일이었다. 이에 맞춰 두 전쟁영웅의 이야기를 각 2회씩 소개한다.

'대한의 꽃' 윤인자는 2012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떴다.
'대한의 꽃' 윤인자는 2012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떴다.

루시 중령의 여인이 된 윤인자는 루시를 적절하게 이용했다. 1년 6개월 가량 동거를 하면서도 윤인자는 루시에게 절대로 손을 벌리지 않았다. 윤인자는 자신의 재산목록 1호였던 제니스 라디오를 40달러에 팔아 이 돈으로 미군부대에 있는 PX에서 여자 원피스 한 벌과 투피스 두벌을 샀다. 그리고 자신의 라디오를 사 준 가게로 달려가 120달러에 다시 팔았다. 순식간에 무려 3배의 장사를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돈은 만 달러를 넘어섰고 돈이 너무 불어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등 행복한 비명소리가 절로 났다. 이 돈으로 윤인자는 대학을 다니는 여대생을 돕기도 하고 기부단체에 흔쾌히 거금을 내놓기도 했다. 연극이나 영화 제작에도 조건 없이 힘을 보탰다. 이것만이 아니다. 루시에게 부탁하여 고아들이 입을 옷과 칫솔, 치약 등을 챙겨 손 제독의 부인인 홍은혜 여사와 함께 봉사활동을 다니기도 했다. 홍 여사는 피 묻은 군복을 매일 빨아 널고 전쟁고아들과 미망인들을 위한 바자회를 여는 등 해군의 어머니로 불리었다. 이런 홍 여사와 윤인자는 해군 병원선을 자주 찾아가 젊은 병사들의 손을 잡아주고 소설이나 시집 등 새 책을 사서 서가에 꽂아주기도 했다. 부상병들이 왕소금으로 이를 닦는 일이 가장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고 루시에게 부탁해서 치약과 칫솔을 구입해 병원에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연고가 없는 병사나 특별히 외로운 병사를 위한 기금도 내 놓았다. 피란 통에 먹지 못해 쓰러진 남매에게 방을 얻어주고 학비는 물론 일자리까지 마련해주는 등 보이지 않은 자선활동을 계속했다. 1951년 말 자산을 확인해 본 결과, 무려 부동산을 제외하고 현금이 대략 2억8000만원이었다. 1951년 삼성물산의 자본금이 3억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윤인자는 루시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높이 산 점은 한 번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돈 얘기를 한 적이 없었소, 당신은 처음 나에게 40달러를 건네주었고 그걸로 장사를 시작했소. 참 대단한 여성이오. 나는 당신의 청을 들어 처음에는 PX 물품을 사주었지만 나중에는 일본에서 고가의 물건들을 사들였소. 사실 이일은 함대 지휘관이 하기에는 부적절한 일이었소.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절대로 제독이 될 수 없을 것이오. 그리고 결혼하지 말고 연기에만 전념하시오. 그 많은 돈을 한국 남자에게 맡기는 순간 그 돈은 날아가 버리고 말 것이오.”

루시는 윤인자와의 이별을 앞두고 이렇게 고백을 했다. 그렇다. 루시는 윤인자를 선택하는 대신 제독의 꿈을 버렸다. 한국의 대통령을 만나거나 무초대사, 직속상관인 조이 제독을 만날 때도 그는 늘 윤인자를 대동할 정도였다. 한국 해군을 유난히도 사랑했던 캡틴 루시는 1998년 6월 29일 86세의 나이로 고향 메이주의 할로웰에서 세상을 떴다. 그는 한국전이 끝나기 전 미 본토로 넘어가 버지니아주의 노포크기지에서 함대사령관을 지내던 중 과로로 인한 신병으로 1960년에 캡틴(대령)으로 예편했다. 미 해군 측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특진과 함께 ‘제독’칭호를 주려고 했으나 그는 정중히 사양했다고 한다. 자신은 함장으로서 ‘영원한 캡틴’이란 칭호가 더 어울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 70년대까지 해군 본부를 통해 윤인자의 행적을 물어오는 등 한국 방문을 시도했지만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2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윤인자는 13살 때 사리원 권번으로 들어가면서 기생이 되었고, 이후 평양과 만주 신경에서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서울 국일관 기생으로 들어간다. 1년후 1943년 만주 하얼빈 태양악극단에 입단하면서 배우생활을 시작하였고 만주 봉천에서 해방을 맞아 귀국한 뒤 백민악극단의 단원으로 배우생활을 했으며 <황진이와 지족선사>에서 주연배우로 서울과 부산등지를 유랑하다가 6‧25전쟁이 터지면서 운명의 루시를 만난 것이다. 윤인자는 1954년 영화 <운명의 손>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 영화에서 윤인자는 이향을 상대로 한국 최초의 키스신을 선보여 큰 화제를 일으킨데 이어 <그 여자의 일생>에서는 한국영화 사상 최초의 알몸 목욕신을 선보이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어 1964년 윤인자는 신영균의 애인인 술집 마담 역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한다. 당시 신상옥 감독은 “한국 영화사에서 윤인자 만큼 강한 개성을 가진 여배우는 아마 만나기 힘들지 않을까”하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1971년 윤인자는 <석화촌><장화홍련전><궁녀><밤에도 뜨는 태양>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989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에서는 노스님 역을 맡아 열연하는 등 평생 배우로서 활동한 그녀에게 서울 여성국제영화제에서는 공로상으로 보답했다. 윤인자는 2012년 91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국란을 당하면 남녀가 따로 없다. 남자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쳐야 하고 여자들은 적군의 노리개가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조선시대 진주성에서 우리의 관군이 패하자 관기 논개는 왜장을 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조선여인의 의기를 보였다. 6‧25가 터지고 대한민국이 북한군의 기습에 밀려 한줄기 낙동강을 방패삼아 마지막 국운을 지키고 있을 때 가냘픈 여배우 윤인자는 그렇게 대한민국 최후의 관기가 되어 국익을 위한 대한의 꽃으로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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