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피란민 구한 현봉학 박사
흥남철수작전, 인류역사장 가장 위대한 생명구출작전

[중소기업투데이 신미경 기자] 한국전쟁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국가 보훈처로부터 ‘6‧25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바 있는 고 현봉학 박사와 북한군의 기습에 밀려 낙동강 전선마저 위협을 받을 당시 한국 해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최후의 관기(官妓)가 된 배우 고 윤인자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주가 6.25전쟁 기념일이었다. 이에 맞춰 두 전쟁영웅의 이야기를 각 2회씩 소개한다.

6.25전쟁 당시인 1950년 12월, 흥남 철수작전의 주인공인 현봉학 박사. 왼쪽은 당시 흥남항구를 빼곡히 메운 피난민의 모습.  
에드워드 알몬드 미 육군 중장

잊을 수 없는 장진호 전투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떠나버리면 저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중공군의 공격에 몰살당하고 말 것입니다. 장군님 제발...불쌍한 우리 국민들을 살려주세요.”

영화‘국제시장’ 흥남 철수 장면에서 한국인 청년인 현봉학(1922~2007)박사가 미군 장군에게 유창한 영어로 피란민들을 배에 태워달라고 호소하는 대목이다.

흥남 철수 작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생명 구출 작전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판 쉰들러’, ‘한국판 모세’로 불리는 현봉학 박사.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그는 함흥고보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버지니아주립대에 유학한 뒤 1950년 3월 귀국,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나자 미 25사단 통역요원으로 자원입대 했다. 이후 1950년 8월 해병대로 차출돼 진동리 전투의 김성은 부대장의 통역관이 됐다. 당시 진동리는 북한국 6개 사단이 포진하는 등 낙동강 전선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하자 당시 김성은 해병대 부대장은 현 박사에게 “미 25사단에 찾아가 군수물자를 얻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미군을 찾아가 무기와 통신기, 탄약 등 트럭 2대분의 군수물자를 조달해 왔다.

이후 해병대는 기습작전을 전개, 북한군 6개 사단을 격파해 창군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당시 진동리 전투를 취재하던 뉴욕타임즈 마가리트 하긴스 기자는 이때 한국 해병대에게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호칭을 붙여 줬다. 이런 전과를 바탕으로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뒤 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진격, 1950년 10월 28일 함흥을 탈환한 뒤 맥아더 장군은 함흥에 10군단 사령부의 설치했다. 당시 10군단 사령관이 바로 맥아더 장군의 오른팔인 알몬드 소장이다. 이때 알몬드 소장이 한국 해병대를 시찰하면서 현 박사를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이후 현 박사는 10군단 민사고문관으로 차출되면서 통역은 물론 주민들의 민생안전을 책임졌다.

1950년 11월 말 전쟁은 머지않아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해 11월 20일 이승만 대통령이 함흥을 방문하고 미군은 이미 국경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원산 함흥일대의 주민들도 안전을 찾아가는 등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이런 달콤함도 잠시, 전선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12월초 유엔군과 국군은 장진호 계곡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군 5만 명, 한국군 2만 명 등 7만 명이 장진호 계곡에 고립된 것이다. 중공군 4대 사단 12만 명이 이미 유엔군과 국군을 포위하고 있었다.

1949년 겨우 대륙통일을 완수하고 인민정부를 세운 모택동의 중공군이 패주하는 김일성을 도우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모택동은 이미 10월 19일 중공군에게 압록강을 건너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게다가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살인적인 추위와도 사투를 벌이면서 당시 6000여명의 동사자가 발생하는 등 최악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급기야 유엔군 사령부는 12월 8일 전선의 군인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지만 퇴로가 없었다. 결국 태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이 무자비한 공중전을 전개하면서 12월 10일이 되서야 겨우 장진호 계곡 탈출에 성공한다. 장진호 전투는 미 해병대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된 배경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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