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피란민 구한 현봉학 박사
흥남철수작전, 인류역사장 가장 위대한 생명구출작전

[중소기업투데이 신미경 기자] 한국전쟁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인물이 있다. 국가 보훈처로부터 ‘6‧25의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바 있는 고 현봉학 박사와 북한군의 기습에 밀려 낙동강 전선마저 위협을 받을 당시 한국 해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한민국 최후의 관기(官妓)가 된 배우 고 윤인자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주가 6.25전쟁 기념일이었다. 이에 맞춰 두 전쟁영웅의 이야기를 각 2회씩 소개한다.

6.25 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의 주인공 현봉학 박사
6.25 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을 성사시킨 현봉학 박사
'장진호 전투'는 현대 전쟁사 중 가장 참혹한 전투로 불린다. 

크리스마스의 기적

1950년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전개된 흥남철수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작전은 미 10군단 지휘 하에 진행됐다. 이미 원산이 적 수중으로 넘어간 터라 철수는 해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10군단의 지휘 아래 12월 15일 미 해병 1사단의 출항을 시작으로 17일 국군 수도사단, 21일 미 7사단이 차례로 흥남항을 벗어났다. 이제 남은 병력은 흥남의 최후 방어선에서 중공군과 맞섰던 미 3사단뿐이었다. 군인들이 철수하는 사이 흥남부두는 10만 명이 넘는 피란민으로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함흥이 고향인 현 박사는 이들 피란민이 이북에 남아 모진 고초를 겪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국군과 유엔군을 도왔던 피란민들이 공산당의 숙청 대상이 되리란 건 불을 보듯 뻔 한 일이었다. 고향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군단의 총책임자 에드워드 알몬드(1979년 작고) 장군을 찾아가 함흥 사람들의 사정을 설명하고 민간인의 철수를 고려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그 과정에서 10군단의 부참모장이자 흥남철수의 실무 책임자였던 포니(1965년 작고) 대령이 힘을 실어 줬다. 그러나 알몬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10만 명에 이르는 10군단 병력을 철수하는 것도 불확실한데 섣불리 민간인을 철수 계획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 당시 흥남부두와 선박 규모로는 피란민을 모두 대피시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피란민들 중 인민군이 끼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그를 고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 박사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알몬드 장군에게 “적들이 사방에서 쳐들어오고 있는 마당에 함흥과 흥남의 민간인들이 갈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며 하소연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애드워드 포니가 “민간인들은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우리 군을 도왔다”며 “LST(탱트나 장갑차를 실으면서 생기는 여유공간)수송선에 일부의 민간인이라도 태울 수 있지 않겠느냐”며 거들었다. 거듭되는 그의 설득을 외면할 수 없었던 알몬드는 결국 민간인 구출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12월 19일부터 피란민 승선이 시작된 배경이다.

약 5일간 메러디스 빅토리호 1만4500명, 버지니아 빅토리호 1만4000명, 기타 LST수송선 등을 통해 9만8000여명이 흥남철수 대열에 몸을 실었다. 12월 24일 부두를 떠난 마지막 수송선 메리디스 빅토리호는 정원이 2000명이었지만 1만4000명을 태웠다. 대신 200t이 넘는 탄약과 500여개의 포탄, 유류 200드럼을 버리고 항구를 폭파했다. 12월 25일 거제도에 도착한 마지막 배에서 5명의 어린 생명이 태어났다. 이들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치 파이브’다. 미군들은 이들을 두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했다. 현봉학과 알몬드의 기묘한 인연도 있었다. 알먼드 소장이 물었다.

“그 유창한 영어는 어디서 배웠소?”

“버지니아 리치먼드 의대에서 배웠습니다.”

“뭐요? 거기는 내 고향인데. 당신 고향은 어디요?”

“군단장께서 주둔하고 있는 함흥입니다.”

알몬드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이 사람은 어쩌면 9만8000명 사람을 구하라는 특명을 받고 이 세상에 왔는지도 몰라.”

현봉학은 전쟁 직후 1953년 미국에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의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버지니아, 콜롬비아 토머스 제퍼슨 의대에서 병리학 및 혈액 교수로 활동하다 1997년 잠시 아주대 의대 초빙교수로 5년간 활동한 뒤 2001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2007년 11월 25일 미국 뉴저지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현 박사는 미국에 거주하면서도 한때 남북통일을 돕기 위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가족들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현 박사는 의료구호 활동을 위해 북한을 수차례 출입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가 흥남철수의 주인공으로 세상에 알려지자 북한은 비자 발급을 중단했다는 것이다. 다시는 고향 땅을 찾을 수 없게 되자 그는 아쉬운 마음에 나중에는 백두산 주변 국경지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이끌어낸 메러디스호는 ‘세계 전사(戰史)에서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인명을 구한 배’로 2004년 세계 기네스북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메러디스호는 1993년 중국에서 분해‧철거됐다. 중공군에 맞서 자유를 향해 닻을 올린 배가 중국에서 그 수명을 다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국가보훈처는 2020년 9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에드워드 알몬드 미국 육군 중장을 선정한 바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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