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질랜드 이민정책의 변화와 한인사회의 성장
박춘태 한국어교육학 박사, 북경화쟈대학교 겸임교수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거주

1989년 8월26일 오클랜드에서 개최된 키위(뉴질랜드인)들과 함께 한 화합의 밤 행사 'Korean Night' 모습.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1989년 8월26일 오클랜드에서 개최된 키위(뉴질랜드인)들과 함께 한 화합의 밤 행사 'Korean Night' 모습.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1993년 11월4일 대한항공 첫 취항을 환영하는 뉴질랜드 오클랜드공항 당국의 물대포 축하 장면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1993년 11월4일 대한항공 첫 취항을 환영하는 뉴질랜드 오클랜드공항 당국의 물대포 축하 장면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박춘태 북경화쟈대 교수
박춘태 북경화쟈대 교수

1974년 1월 까지만 하더라도 뉴질랜드에는 한국 공관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한인 동포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은 물론, 구심점을 마련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한인 사회를 조직화하는 것은 더더욱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어려움과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국의 공관이 필요했다. 당시 뉴질랜드 거주 한인 동포들의 간절한 염원은 한국 공관 설립이었다.

1974년 2월. 드디어 동포들이 원하던 한국대사관이 수도 웰링턴에 설립돼 초대 대사로 강춘희 대사가 부임했다. 그리고 약 8개월 후, 그 해 10월25일. 재뉴질랜드 한인회 창립모임이 한국 대사관 관저에서 열렸다. 첫 모임이라서 뉴질랜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대부분의 동포들이 참석했는데, 당시 전체 동포의 수는 129명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수치는 대사관, 무역관 직원, 장단기 체류자, 어업 전진기지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순수 한인 동포 거주자 16명, 콜롬보 유학생 10명, 그리고 어업 전진기지에 103명이 체류하고 있었는데, 지역별로 보면, 최북단에 위치한 노스랜드(Northland)에 36명, 베이 오브 플랜티(Bay of Plenty)에 35명, 타라나키(Taranaki)에 32명 등이었다.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모두 북섬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순수 한인 거주자 면에서 보면, 1961년 3월에 10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13년 동안 변화가 거의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재뉴 대한민국 대사관의 개설은 한인회의 출범을 가져와 한인사회의 조직화는 물론, 한인들의 화합과 번영의 구심점을 마련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할 수 있다.

재뉴 대한민국 대사 관저 전경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재뉴 대한민국 대사 관저 전경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초대 뉴질랜드 한인회장 박흥섭 씨와 축사를 읽고 있는 강춘희 초대 대사.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초대 뉴질랜드 한인회장 박흥섭 씨와 축사를 읽고 있는 강춘희 초대 대사.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1970년대말까지 한인 사회는 국제 결혼 또는 취업, 녹용 사업, 콜롬보 유학생, 대사관·무역관 근무 직원, 장단기체류자 등이었다. 이 당시 특이한 점이 나타났는데 한인들이 녹용 사업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남긴 큰 족적이라 할 수 있다.

184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뉴질랜드에는 사슴이 없었다. 그러다가 1850년대 영국 초기 이주자들이 관상용으로 적록에 속하는 ‘엘크(ELK)’라는 대형 사슴을 뉴질랜드에 들여왔다. 뉴질랜드의 대초원에 방목된 사슴들은 자연 약초를 먹고 번식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까지 뉴질랜드에서 녹용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키위(뉴질랜드 현지인)들은 사슴을 사냥한 후 사슴뿔을 폐기물로 취급했다. 그들은 사슴뿔의 시장 가치를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것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뉴질랜드와 달리, 한국에서는 사슴이 건강, 장수의 상징으로 불리었기에 녹용은 풍부한 칼슘, 보정강장용 보약으로 애용되었다. 키위들이 아무렇게 버리는 사슴뿔을 본 한국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국인들은 자루를 갖고 다니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닥치는 대로 사슴뿔을 모았다. 그리고 녹용사업을 펼쳐 수출을 하는데, 대박을 터뜨린다.

일례로 1975년 2월, 한 한국인이 합작으로 녹용사업을 시작했는데, 공장을 신축할 때 부동산 평가액의 9배까지 융자를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적극적인 지원이 가능했던 동인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할 수 있는 사업이라고 뉴질랜드 기관에서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보상금까지 받는다. 그 이유는 무용지물로 생각하는 야생 사슴을 잡아 준 대가였다.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녹용사업을 시작한 김경준 씨(왼쪽)와 Sir Tim Wallis 씨(뉴질랜드 사슴 산업 개척자-1973년1월)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녹용사업을 시작한 김경준 씨(왼쪽)와 Sir Tim Wallis 씨(뉴질랜드 사슴 산업 개척자-1973년1월) [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한인들의 종교활동을 보면, 1980년대 중반까지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동포의 수가 수십명에 불과하여 교파 초월은 물론 카톨릭신자, 불교신자 등 다른 종교인,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참석했다.

1987년 10월19일. 검은 월요일(Black Monday)에 발생한 뉴욕증권시장의 주가 대폭락 사건은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불러왔다. 이 여파는 뉴질랜드도 예외없이 강타했다. 뉴질랜드 외환 보유고는 바닥이 났으며 이로 인해 극심한 인플레, 엄청난 외채를 떠안게 되었다. 나라가 전반적으로 암울했기에 현재도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뉴질랜드 정부로서는 획기적인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방안이 이민 정책의 변화였다. 이민 대상을 확대하는 한편, 투자이민제도를 마련한다. 이민 대상으로는 유색 인종에게 이민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유색 인종에 대한 이민을 철저히 봉쇄해 온 뉴질랜드로서는 천지개벽이었다. 또 인종 구분없이 투자 이민도 허용하게 된다. 유색 인종에 대한 이민 문호를 불허했던 뉴질랜드는 가장 늦게나마 개방되었다. 결국 뉴질랜드의 경제가 최악으로 치달았을 때 유색 인종 아시안에 대한 이민 문호가 개방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한국인들에게 큰 관심거리로 부상했다. 1988년부터 투자 이민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신청을 하게 돼, 1989년부터 이주자가 가파른 속도로 증가하게 된다.

1991년 11월부터는 또다른 변화의 큰 물결이 몰려왔다. 그것은 점수제에 의한 일반이민제도가 발효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1992년부터 일반 이민자의 움직임이 시작돼 기하급수적으로 동포가 증가하게 됐다. 동포 가구주의 90% 이상이 대졸이상 고학력이었으며 경력도 다양했는데, 대기업체 출신 중견간부, 엔지니어, 의사, 약사, 교사, 은행원, 언론인 등이었다. 많은 한국인들은 뉴질랜드를 남태평양의 낙원으로 여겼기에 이민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호기심을 키우고, 논리적 사고력 등을 키워 주는 교육, 높은 삶의 질, 사회보장제도, 아름답고 공해없는 풍광은 한국인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이민 동기부여의 핵심 인자였다. 당시 오클랜드에 거주했던 한 동포는 “1년에 중학생 2명에 드는 총 교육비가 당시 환율로 200 뉴질랜드달러(한화 10만원)도 안됐다. 교재, 교복 구입비 정도로만 쓰였다. 아울러 연중 내내 골프를 치는데, 총 비용이 30만원(600 뉴질랜드달러)에 불과했다”라고 말했다.

뉴질랜드 사슴농장(출처: 123rf)
뉴질랜드 사슴농장 [출처= 123rf]

1991년까지만 해도 전체 동포의 수가 1000명도 채 되지 않았으나 1992년에 이르러 한인 수는 3049명에 달했다. 이 중 순수 한인 동포는 1762명이었다. 1994년 들어서면서 뉴질랜드로 유입되는 이민자들의 숫자는 더욱 증가했다. 1994년 한해동안에 무려 5000명에 달할 정도로 급부상한다. 그 결과 전체 동포수는 1만5000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의 인구가 93만 명이었다. 오클랜드 거주 한인 동포의 수만 1만2000명이었는데, 이는 전체 동포의 80%가 오클랜드에 거주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동포들은 강한 의지를 갖고 역동적으로 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에서 가장 번화가인 ‘퀸스트리트(Queen Street)’를 비롯하여 약 500개에 이르는 사업체가 오클랜드 지역에서 활발히 운영되기 시작했다. 상권의 확대와 더불어 코리아 타운도 형성됨으로써 한인들의 연결망 확대와 다양한 문화 활동이 전개되었다. 오클랜드 지역은 중국인과 인도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한인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오클랜드의 노스쇼어(North Shore) 지역에서는 한국어가 영어 다음으로 많이 쓰인 언어였다.

뉴질랜드 풍광. [박춘태 칼럼니스트]

한편 남섬에서도 다수의 동포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남섬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정원의 도시로 불리는 크라이스트처치 지역에는 약 2000명에 이르는 동포가 거주하게 되었다.

이렇듯 1990년대 한인사회는 상당한 양적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그늘진 곳이나 경사진 곳이 없을 수 없었다. 한인 동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복합성으로 인해 발생되는 정체성의 혼란, 마주하는 다양한 어려움이었다, 특히 의사소통 지장은 사회문화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뉴질랜드 영어가 미국 영어와 다소 다른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