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 참전을 기억하는 역사의 장(場)이 되다'
박춘태 한국어교육학 박사, 북경화쟈대학교 겸임교수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거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홀스웰쿼리공원 내 '송파가든'에 세워진 한국형 정자(왼쪽). 오른쪽 사진은 정자 천정 위에 부착된 캔터베리지역 출신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이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홀스웰쿼리공원 내 '송파가든'에 세워진 한국형 정자(왼쪽). 오른쪽 사진은 정자 천정 위에 부착된 캔터베리지역 출신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이름.

 

박춘태 북경화쟈대 교수
박춘태 북경화쟈대 교수

크라이스트처치는 뉴질랜드 남섬 캔터베리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다. 정원의 도시로 알려진 이 도시에 한국 이름의 정원이 있다. ‘홀스웰쿼리공원(Halswell Quarry Park)’ 안에 있는 ‘송파가든’이다. 송파가든이 설립된 배경을 보면, 1995년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市와 서울 송파구가 자매결연을 맺은 후, 2001년 2월 17일에 개방되었다. 송파가든에는 한국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는 몇몇 형상물이 있다. 돌하르방, 장승, 평상, 석등, 돌담, 정자 등이다. 대부분의 형상물이 한국에서 공수되었기에 한국적 미(美)를 물씬 풍긴다고 할 수 있다. 가든은 입구 양쪽에 놓인 돌하르방 한 쌍이 방문자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남녀 2개의 큰 장승은 마치 전통 혼례를 연상하는 듯한 머리 형태를 갖추고 있다. 장승에는 크게 한글로 ‘송파·크라이스트처치’, ‘우정을 위하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2022년 6월 4일. 공원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한·뉴 수교 60주년을 맞이하여 공원에 한국식 정자가 완공되었다. 그런데 정자 천정을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작은 까만색 명판에 흰색으로 이름이 촘촘히 쓰여져 있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한 캔터베리지역 군인들의 이름이다. 정자의 설립 의의는, 한국전통 건축물의 홍보·전승은 물론,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그들의 공로를 전할 수 있는 역사의 장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뉴질랜드에서 한국 전쟁이 잊혀진 것은 아니었지만, 거론이 많았던 것도 아니다. 이는 1899년에 일어난 남아프리카공화국 전쟁, 제1·2차 세계대전 등의 참전을 더 부각시켜 왔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회원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요청 당일 뉴질랜드 정부는 1000명으로 구성된 포병부대를 창설해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다음날 의회도 동의해 모병에 들어갔는데, 9일 만에 전국에서 5892명의 자원자가 몰렸다. 이를 ‘케이포스(K-force)’라고 부른다. 당시 총 인구가 190만 명에 불과했지만, 뉴질랜드는 한국전에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섰다.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출항하는 뉴질랜드군인들과 환송객들 모습.   
한국전에 참전하기 위해 출항하는 뉴질랜드군인들과 환송객들 모습.   
한국전에 참전 중인 뉴질랜드군인들이 전기선을 옮기는 모습.
한국전에 참전 중인 뉴질랜드군인들이 전기선을 옮기는 모습.

전쟁 발발 나흘만인 그 해 6월 29일에 뉴질랜드 해군은 드디어 호위함 2척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호위함인 ‘투티라(Tutira)함’과 ‘푸카키(Pukaki)함’이 7월 3일 오클랜드를 떠나 한달 만인 8월 2일 일본 사세보(Sasebo)항에서 유엔군에 합류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보급선 호위 임무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해상 초계, 육군 함포 지원 사격, 기뢰 제거 작전, 유엔군의 대형 함정 엄호를 담당했다. 이를 시작으로 자원용사들의 1진 출발은 1950년 12월 10일 웰링턴에서 있었다. 가족, 친지, 일반국민들의 열렬한 전송을 받으며 ‘와히네(Wahine)호’라는 여객선을 탔다. 이 여객선은 1913년 스코틀랜드에서 건조해 페리로 사용했는데, 한국전이 발발하자 병력수송선으로 뉴질랜드 정부가 임대했다. 뉴질랜드 정부 차원에서 한국에 병력수송을 위해 임대까지 한 점이 놀랍다. 그 해 12월31일 부산에 도착한 그들은 한국의 매서운 겨울 추위에 혹독함을 감내해야만 했다. 뉴질랜드의 기온은 일반적으로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문 일인데, 12월 말이 뉴질랜드에서는 한여름이라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추위를 맞이했을 것이다. 막사 밖에서 보초를 섰던 한 뉴질랜드 병사는 30분 서있기가 힘들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다.

1951년 8월 2일. 다시 와이네호는 병력을 싣고 웰링턴을 떠났다. 그러나 호주 마젤라섬 인근에 다다랐을 때 좌초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탑승자 모두 구조된 후, 항공편으로 일본 히로(Hiro)에 설치된 뉴질랜드군 기지로 이송됐다. 하지만 좌초 사고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이네호는 폐기된다.

뉴질랜드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주요 이유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군사동맹의 이행에 있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 세 나라는 1950년 1월에 ANZUS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함께 군사행동을 하는 것이 의무화돼 있기 때문이다. 안전보장이사회의 한국전 참전 결정은 국제평화 유지가 목적이었다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필자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한국전 참전용사의 후손인 테일러(Taylor)씨를 만났다. 그는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에 큰 보람을 느끼며 한국 정부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참전용사는 물론, 가족까지 챙겨줘서 고마움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뉴질랜드군 파병은 양국의 번영을 추동하고 양국 관계를 굳건히 지탱하는 핵심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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