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미 칼럼니스트
고양생명의전화 상담 매니저, 심리학자

이선미 칼럼니스트
이선미 칼럼니스트

유튜브는 디지털 시대 소통의 상징이 되었다. 가끔 유트브를 볼 때면 그 밑에 달린 댓글들을 살펴보기도 한다. 대부분 다양한 시각보다는 하나의 생각이나 신념을 추종하는, 천편일률적인 내용으로 뒤덮일 때가 많다. 같은 생각과 신념만을 허용하고, 보고싶은 것만 보는 ‘확증 편향’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콘텐츠를 찿아 스스로 진실임을 굳이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신념’으로 고착화 되어간다. 그리곤 ‘무의식적인 집단의 힘’으로 표출되곤 한다.

나아가서 집단의 힘은 일종의 편향된 ‘사회적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 집단 속에서 한 개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남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모방하고, 생각에 동화된다. 무리에 녹아드는 것을 더 염원하고, 남들이 믿는 것을 함께 믿고 확신하게 된다. 감정도 집단의 감정과 정서에 순화되며, 그런 맥락의 비이성적인 행동도 쉽게 한다. 비슷하거나 똑같은 사회적 인격을 갖춘, 집단 구성원들이 모두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 인격은 존재로서의 한 개인의 인격을 압도해버린다. 타인과 집단의 도그마를 그저 경청하면서, 그들의 행동에 나를 끼어 맞추는 것이다. 나만의 개성이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따윈 중요치 않다. 나만의 세계와 가치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자각을 키우는 노력 따위는 스스로를 부정하는 불순한 행위가 되고 만다. 그러면 오히려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뿐이다. 곧 ‘확증편향’의 노예가 되는 길이 가장 편하다.

심리학적으로 확증편향은 오래된 우리 본성의 일부다. 확증편향은 인류가 탄생할 때부터 진화된, 외부에 대한 ‘공격적 방어심리’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열등의식이 개입된 불안한 심리기제와도 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외부인에 대한 깊은 의심과 적개심이라든가, 누군가를 악마로 만들고 싶은 욕구 같은 것들이 그런 것이다. 먼 옛날부터 존재했던 무시무시한 전염병이나 생존을 위협하는 다른 부족과의 경쟁 등이 그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런 식의 집단 반응은 21세기 디지털 문명기엔 더욱 심각하게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온갖 첨단의 디지털 미디어가 지배하는 지금 시대에는 더욱 폭력적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코로나19’ 이후 더 극심해진 혐오나 증오범죄에서 보듯, 최악의 경우엔 사회 집단의 폭력적 아노미 현상을 부추기까지 한다. 그처럼 비뚤어진 사회적 인격의 집합이라고 할 확증편향은 한 존엄한 개인의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사고 능력을 저하시키고, 극히 이성적이어야 할 현대 사회를 야만의 시대로 돌변하게 할 수도 있다.

지금은 ‘과잉 소통’의 시대다. 현란한 소셜미디어와,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과 정보를 공유하는 사물인터넷이나 통신 기술, 생성형AI와 5G·6G와의 융합이니 뭐니 하는 시대다. 인간은 이제 사회적 동물이라기보단, ‘소통 당하는’ 동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마저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소통과 설득을 당하는 과정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작용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것이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남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가는 것에 익숙해질 뿐이다. 앵무새처럼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전해진 편견과 왜곡된 관념을 추종하며, 수많은 부적절한 의사결정을 추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집단 지성 혹은 ‘집단 이성(理性)’이다. 집단이 우리의 사고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철저히 분별하는 것이다. 그런 자각을 통해 더 낮고 저열한 의식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집단이 강요하는 폭력적 확증편향의 심리학적 역학관계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도 역시 집단 이성에 포함된다. 유튜브,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 전파된 정보의 홍수를 헤쳐나갈 지적 나침반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 섬세하게 정보를 걸러내고 식별할 수 있고, 무분별한 대중적 언어와 거리를 두며 나만의 정신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나만의 정체성과 함께 내 인생을 위한 나만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의심하고, 반추하고, 여러 대안을 고려할 수 있는 능력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 집단의 맹목적 광기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주체적 개인이 갖는 ‘집단 이성’뿐이다. ‘집단 이성’은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테크노피아’가 아니라, 인간 정신이 중심이 된 ‘휴머노피아’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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