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동포의 긍지와 자존심을 찾아서'
정영수 CJ글로벌경영 고문 (수필가)

정영수 CJ글로벌경영 고문, 수필가
정영수 CJ글로벌경영 고문, 수필가

며칠 전 후배에게서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라는 책을 소개받았다.

요즘 들어 노안이 심해 방 건너편 벽장 시계도 보지 못할 정도여서 책 읽는 것을 멀리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카톡으로 보내준 후배의 책과 작가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이 책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데다가 우리 큰딸애가 1년 6개월 전에 싱가포르에서 이민진씨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비록 한국말은 못하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알려진 유능한 작가라는 설명에, 나는 곧바로 서울에 연락해서 2권으로 된 <파친코>를 구매한 뒤 단숨에 쉬지 않고 다 읽었다.

이 책은 동포 1.5세인 이민진씨가 미국에서 영어로 먼저 발표한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작가는 무려 30년에 걸쳐 이 책을 썼으니 그녀의 인생도 고스란히 들어있는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1910년부터 1989년까지 4세대에 걸쳐 ‘디아스포라’ 속에 살아가는 한국계 일본 동포의 생활상을 담담하게 그러나 치열한 심정으로 그린 책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4대에 걸친 리얼하고 파란만장한 역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파친코>는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게 극심한 차별을 받으며 살았다. 아이들은 차별을 넘어 폭력을 당하기 일쑤였다. 제대로 공부조차 할 수 없었던 조선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험한 일들만 해야 했다. 그래서 더욱 심한 괄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사람들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살거나, 장사를 하여 부를 이루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하며 가난한 삶을 짐승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는 1900년대 초창기의 우리나라 사회상이 자세히 나와 있어 조선말 우리의 경제사정이 얼마나 열악하고 비참하였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 1930년 세계전쟁, 1945년 일본항복, 1950년 한국전쟁 이후의 재일동포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처참했는지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뻐근하고 코끝이 찡해왔다. 그야말로 그들의 삶 자체가 소설이었다.

주인공 ‘선자’는 부산 영도에서 어머니가 하는 하숙집을 도와주다 예기치 못한 결혼으로 일본으로 이주한 뒤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선자는 한글뿐 아니라 일본에 가서도 일본말을 할 줄 몰랐다. 오직 온몸이 부셔져라 일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선자는 말도 안 통하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들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큰 아들은 와세다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그러나 한국인이라는 차별과 냉대 때문에 끝내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파친코’라는 특수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조선인이 대부분인 파친코 사업에서는 조선인이라고 차별받지 않는 유일한 직업군이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파친코 사업가들을 그저 폭력배나 야쿠자로 치부해서, 아무리 불철주야 열심히 일을 하여 부자가 되었어도 깡패 정도의 취급밖에 받지 못했다. 비록 부는 이루었어도 사회적으로 걸맞는 대우는 커녕 결혼조차 정상적으로 하기 힘든 상황에서 끝끝내 숨막히는 인종차별을 받는 동포들의 삶은 아무리 노력해도 슬프고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토록 불평등하고 불확실한 삶의 고비고비를 온몸으로 넘기면서도, 자신의 뿌리인 모국을 잊지 않고 고국의 규범과 관습을 지키며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출판 3년이나 지난 이제라도 이 소설을 읽게 된 것이 다행이고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난 시대뿐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동포들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냉철하게 돌아볼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땅에서 태어나 일본 말을 모국어로 사용하며 세금도 내는 재일동포는 50여만명도 넘는다. 그러나 아직도 재일동포가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이민진 작가가 쓴 일본 동포의 삶은 한마디로 짐승과 같은 차별의 삶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떠한가.

바로 2년 전에 나는 일본을 방문했었다. 그때 돌아와서 당시 일본에서 보고 느낀 충격을 지인들과 나누며 개탄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일본에 머물면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전기·전자 백화점을 방문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수만 종류의 세계 각국 제품 중에서 오직 한국제품만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세계 판매 1등을 하고 있는 핸드폰과 TV 등은 당연히 있을 줄 알고 찾아보았지만 미국, 유럽, 중국 제품들은 다 진열되어 있어도 우리 한국 제품만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뿐인가.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한국차가 일본 땅에서는 내 눈에는 한 대도 띄지 않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극악한 편견에 놀라움을 넘어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반대로 한국 땅에 돌아다니는 그 많은 일본 차를 생각하니 우리가 얼마나 지난 치욕을 쉽게 잊어버리는지 한심하여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문제의 중심에 나는 위정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러한 문제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는 양국의 위정자들에게 더욱 일침을 놓고 싶다. 권력에 아부하며 호가호위하는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비롯하여 문인과 언론인, 교육자들도 똑바로 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통렬히 반성하며 국민들께 사죄하여야 할 것이다.

다행히 나는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45년을 살면서 차별보다는 한국인의 근면성과 위상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존경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전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편견과 불평등과 냉대를 받으면서 사는 수많은 동포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그 자녀들의 인생은 또 어찌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무거워진다. 비록 일본처럼 심한 인종차별은 아닐지라도, 다들 아는 바와 같이 우리의 자녀들이 생활하는 서양과 유럽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우리나라가 부강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부강하고 존경받는 일류국가가 되어야 만이 우리의 후손들이 다시는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와 스포츠, 예술 등은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안타깝게도 위정자들의 지도력은 그렇지 않아서 미래가 나아질 것 같지 않아 암담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위정자들을 똑바로 선택해야 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이 이 나라의 미래가 되고, 전 세계에 있는 우리 후손들의 미래가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해외에 사는 우리 동포들도 마인드와 철학을 글로벌하게 바꿔야 한다. 어느 나라에 살든 그 나라의 정치와 문화 등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그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넘어 그 사회의 리더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보람있고 의미있는 해외생활을 영위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말고 정직을 바탕으로 노력하고 모범과 질서를 지킬 때 이민생활의 냉대와 차별은 극복될 수 있으며, 해외동포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대대손손 자손들에게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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