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도체·AI까지 ‘韓美 초대형 경제패키지’ … 中企 ‘기회와 부담’ 동시 확대

韓美, 3850억달러 전략 협력 패키지 공식화… 공급망·안보 구조 전면 재편 관세·규제 완화로 수출 환경 개선… 자동차·반도체·제약 중소기업 수혜 기대 조선·원전·방산 협력 확대… 美 프로젝트 참여 가능성 열리며 중소 공급망 주목 AI·디지털 규범은 득실 교차… 美 빅테크 영향력 확대에 국내 IT기업 경쟁 압력 외환·방위비·규범 부담은 장기 리스크… 정부 지원·中企 대응 전략 중요성 커져

2025-11-15     황복희 기자
이재명 대통령이 11월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기자회견장에서 한미 관세·안보 협상 '조인트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 최종 합의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용범 정책실장, 이 대통령, 위성락 국가안보실장, 이규연 홍보소통수석. [연합뉴스] 

[중소기업투데이 황복희 기자] 조선·반도체·AI까지를 아우르는 초대형 한미 경제 패키지가 가동되면서 국내 중소기업에도 기회와 부담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

한미 양국이 지난 10월 29일 경주 정상회담에서 논의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한 조인트 팩트시트(Joint Fact Sheet, 공동 설명자료)를 11월 14일 각각 공개하면서, 총 3850억 달러 규모의 전략적 통상·투자 협력 구상이 구체적인 문서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문서에는 조선, 반도체, 제약, 항공, 핵심광물, 인공지능(AI), 원전, 방산 등 핵심 산업에서 양국이 추진하기로 한 구체적 조치들이 담겼다. 지난 7월 발표된 ‘대한민국 전략적 통상·투자 협정’의 후속 조치이자, 경주 정상회담에서 최종 조율된 내용을 공식화한 것으로, 양국 공급망과 안보 구조, 무역·투자 질서 전반에 중대한 변화를 예고하는 내용이라는 평가다.

한국 입장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미국 시장에서 관세·비관세 장벽이 일부 완화되면서 제조업 전반의 가격 경쟁력이 개선될 여지가 커졌다는 점이다.

미국이 한국산 자동차·자동차 부품·목재·의약품 등에 적용하던 무역확장법 232조 관세를 최대 15% 상한으로 조정하면서, 관련 품목을 수출하는 국내 기업들은 예측 가능한 관세 환경을 확보하게 됐다.

특히 FMVSS(미국 연방 자동차 안전기준) 인증 차량 5만 대 상한이 폐지되고, 배출가스 인증 시 미국에 제출된 서류 외 추가 서류를 요구할 수 없도록 한 조항은 완성차 업체뿐 아니라 미국 수출을 노리는 중소 부품·전장 업체의 부담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행정 절차와 인증비용이 적지 않게 들던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실제 비용 절감과 진입장벽 완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조선·원전·방산 분야 협력 강화는 보다 전략적인 의미를 지닌다. 미국이 한국의 1500억 달러 규모 조선 투자 계획을 공식적으로 환영하고, 미국 상선과 해군 함정의 한국 건조 가능성을 문서에 처음으로 명시한 것은 한국 조선업계에는 상징성과 실리를 동시에 안겨준다. 미국 내 조선업 기반이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한국 조선소가 미국 프로젝트를 직접 수주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형 조선사뿐 아니라 선박 기자재, 도장, 배관, 엔지니어링 등 조선 공급망에 포진한 수많은 중소·중견기업에게도 새로운 수주 기회로 이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해양플랜트, 친환경 선박, 조선소 현대화 설비까지 연계되면, 국내 중소 조선·해양 기업들이 미국 시장과 글로벌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효과도 기대된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미국이 한국산 반도체 제품 및 제조장비에 대한 232조 관세를 적용할 때, 향후 타국과 체결할 대규모 반도체 협정보다 불리하지 않은 조건을 보장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이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이 추진하는 미국 투자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이들과 거래하는 장비·부품·소재 중소기업의 대미 공급망 참여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장치로도 해석된다. 미국 현지에 조성되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공장에 한국계 협력업체가 동반 진출하거나, 국내에서 생산한 장비·부품이 공급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 강화되는 셈이다.

자동차 분야도 수혜가 기대되는 대표 산업이다. 이번 합의로 FMVSS 기준으로 인증된 미국산 차량 5만 대 무관세·무수정 허용 상한이 폐지되고, 한국이 미국산 차량에 추가적인 인증 서류를 요구할 수 없게 되면서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한 비관세 장벽 완화가 이뤄졌다. 한국산 자동차에는 15% 상한의 관세가 적용되고, 배출가스 서류 추가 요구가 금지되면서, 완성차 업체뿐 아니라 부품 수출 중소기업들의 중장기 비용 구조 개선과 수출 확대에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원전과 방산 협력은 한·미 동맹의 전략적 깊이를 한층 더 키우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미국이 한국의 핵추진 공격잠수함(SSN) 건조를 승인하고, 연료 공급과 관련한 기술·규제 요건 협력에 나서기로 한 것은 방산·해양 분야에서 그간 상징적으로만 거론되던 ‘전략 자산 협력’이 현실화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원전 연료와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분야에서 미국의 지원을 명문화한 대목도 원전 기술 자립도 제고와 관련 산업 생태계 확장에 적지 않은 파급력을 가질 전망이다. 이러한 변화는 원전·방산 분야 특수 소재·부품을 공급하는 국내 중소기업에게도 중장기적으로 새로운 프로젝트와 기술 협력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AI·디지털 분야에서는 규범 및 규제 갈등을 완화하는 내용을 담되, 동시에 미국 빅테크의 한국 시장 접근성을 강화하는 조항들도 포함됐다. 양국은 망사용료, 온라인 플랫폼 규제에서 특정 국가 기업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불필요한 규제 장벽을 제거하고 데이터의 국경 간 이전을 보장하기로 했다.

이는 한국 입장에서는 AI·데이터 기업이 미국과 사업을 할 때 제도적 불확실성이 줄어들고, 미국 시장에서 디지털·플랫폼 사업을 추진할 때 안정성을 확보하는 효과가 있다. 반대로 한국 시장에서는 미국의 대형 플랫폼과 클라우드 기업들이 한층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어, 국내 AI·플랫폼 스타트업과 중소 IT기업에는 경쟁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공존한다.

14일 경기도 평택항에 컨테이너가 쌓여 있는 모습. [연합뉴스]

한편 미국은 이번 합의를 통해 3500억 달러 규모의 한국 기업 투자를 유치함으로써, 핵심 산업 공급망을 안정시키고 자국 제조업을 재건하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대한항공의 보잉 항공기 103대 구매는 미국 항공·우주·엔진 산업에 직접적인 수익을 안겨주고, ‘바이 아메리카 인 서울(Buy America in Seoul)’ 이니셔티브를 통해 미국 중소기업의 한국 수출을 촉진하는 장도 마련한다.

노동, 환경, 지식재산권 등에서 미국식 기준이 확산되면, 규범 측면에서도 미국이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산 제품의 미국 내 시장 점유율 확대는 자국 중소 제조업계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고, 원전·군사·첨단기술 협력 확대는 미국 내부에서 기술 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자극할 소지가 있다. 투자 유치에 따른 보조금, 인프라 부담 역시 미국 정부와 지방정부가 관리해야 할 과제로 남는다.

이번 패키지가 규모와 상징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양국 모두에게 경제·재정·정치적 부담을 함께 안겨주는 ‘구조적 합의’라는 점이다. 한국은 관세·비관세 장벽 완화와 전략 산업 협력 확대라는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얻는 대신, 매년 최대 200억 달러 수준의 외환 조달 수요와 2030년까지 미국산 무기 250억 달러 구매, 주한미군 지원 330억 달러 등 중장기적 부담을 떠안게 됐다. 국방비를 GDP의 3.5%까지 조기 증액하겠다는 계획도 재정 운용과 금융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거시적 부담은 환율 변동성과 금리 환경을 통해 기업 금융비용과 환헤지 비용에 반영되며, 결국 자금 여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소기업 경영 환경에도 간접적인 압박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번 한미 초대형 경제 패키지는 대기업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함께, 그 밑에서 실제로 부품과 장비를 공급하고 서비스를 뒷받침하는 중소기업에게도 새로운 기회와 리스크를 동시에 안겨주는 결과가 될 전망이다.

조선·반도체·자동차·원전·AI 등 전략산업 전반에서 한국 기업의 미국 프로젝트 참여 여지가 넓어지는 만큼, 중소기업이 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주와 투자, 기술 협력으로 연결하느냐가 실질적 성과를 가르는 핵심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외환시장 안정, 규제·표준 변화, 미국식 규범 확산 등 거시·제도적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후속 지원과 중소기업의 선제적 전략 수립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