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삼성, 혼자 가면 빨리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
- TSMC에서 본 한국의 삼성전자의 시사점 김기찬 인도네시아 프레지던트대학교 국제총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석좌교수
“닫힌 혁신의 삼성전자는 조직을 분사하고, 연구개발에서 벤처기업과의 협업과 열린혁신에 매진해야 한다. 삼성전자, 혼자 가면 빨리 가고 함께 가면 멀리 간다.”
지난 7월, 홍콩시립대를 떠나 대만 타오위안 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곧장 신주로 향했다. 그곳에는 대만 반도체 산업의 심장이라 불리는 ITRI(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 工業技術研究院)가 있기 때문이다.
ITRI 건물 벽면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산이 위대한 이유는 다양한 층이 축적되었기 때문이고, 산업이 번영하는 이유는 혁신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단 한 줄이지만, 대만 반도체 산업의 열린 혁신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ITRI, 기술사업화의 산실
ITRI에서 나는 기술의 ‘상용화’를 담당하는 기술사업화 및 산업서비스센터 총괄책임자인 첸 박사를 만났다. 그는 HP에 근무한 적도 있고 인도네시아 그룹의 사외이사도 한 경험이 있어 3일간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다. 이 사례를 한국에서 발표해달라고 부탁도 했다.
ITRI는 MIT, Fraunhofer, AIST Japan과 함께 세계 3대 산업기술연구소로 꼽힌다. 그러나 단순한 연구기관이 아니다. 기술사업화(Commercialization)와 산업 연계(Industry Collaboration)에 성공한 R&BD(R&D + Business Development)의 세계적인 모델이다.
TSMC와 UMC의 탄생 역시 ITRI 내부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ITRI는 노동집약형 산업에서 지식집약형 고기술 산업으로의 전환, 바로 반도체, 나노 세계에 대만의 명운을 걸기로 한 비전을 만들고 기술개발에 매진했다.
이 기술과 비전의 실행을 이끈 사람은 TSMC 창립자 張忠謀(Morris Chang)이다. 그래서 TSMC가 만들어졌다.
이곳의 연구원들은 기술을 들고 창업을 도왔고, 국가가 이를 생태계로 확장했다. 현재도 ITRI는 스타트업 육성, 산학협력, ESG 기반 산업전환을 주도하고 있다.
이곳에 특히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이곳에서 만난 이들, 모든 기술자가 마케팅과 창업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대만 반도체의 힘: 중소기업 + 고객기반 혁신
대만 반도체는 한마디로 열린 플랫폼이다. 고객 맞춤형 생산을 중심으로 고객의 니즈에서 출발한 기술 혁신이 핵심이다. TSMC는 세계의 팹리스 기업들과 협업하면서 고객의 주문에 맞춘 생산 방식을 구축했고, 그 과정에서 끊임없는 공동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는 한국 삼성전자의 수직통합형 전략과 대비된다. 삼성전자는 모든 공정을 내부에서 통제하면서 품질과 속도에서 초격차를 만들었지만, 대만은 중소기업과 글로벌 고객들이 참여하는 수평적 생태계를 설계했다.
혁신만으로는 부족하다 – 드러커의 통찰
드러커는 혁신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다. 마케팅이 없으면 고객이 없다.
혁신은 가치창출이고, 마케팅은 고객창출이다. 드러커는 기업이 ‘혁신과 마케팅’이 전부이고, 나머지는 비용이라고 정의했다.
피터 드러커는 기업의 본질은 두 가지, 혁신과 마케팅이라고 했다. 나머지는 모두 비용이라고 정의했다.
한국의 반도체는 대량생산이고, 대만의 반도체는 고객화생산이다. 고객의 주문을 받아 대응한 만큼 부가가치도 높고, 고객의 요구에서 혁신의 씨앗을 만들어낸다.
최근 삼성전자는 재무총괄책임자가 프로젝트를 좌지우지하는 삼무원화와 비교된다.
삼성전자는 혁신기능을 내부화하고 있지만 대만반도체는 더 열린 혁신과 고객기반 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혁신은 가치(Value)를 만들지만, 마케팅이 없다면 고객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만은 이 두 축이 모두 균형을 이뤘고, 기술혁신은 ITRI가, 시장혁신은 고객과의 공진화(Co-evolution)로 가능했다.
삼성전자에 던지는 시사점
삼성전자는 여전히 내부 중심의 기술 혁신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외부 스타트업, 중소기업과의 협업이 절실하다.
현재 삼성은 재무중심의 조직 구조, 즉 재무총괄이 기술개발까지 통제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고객의 요구보다 내부 판단이 우선되는 구조다. 그러나 대만의 반도체 생태계는 고객의 요구에서부터 혁신이 시작된다. 고객이 곧 시장이고, 시장이 혁신의 방향을 이끈다.
결론: 삼성전자, 내부개발에서 창업 생태계로 디자인하라
한국 반도체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가지려면 단독 질주하는 챔피언이 아니라, 혁신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을 함께 이끄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삼성전자는 이제 기술력만으로 승부할 것이 아니라, 벤처와 중소기업을 친구로 삼고 함께 성장하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 고객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스타트업과 공동으로 시장을 디자인하는 시스템적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
TSMC의 뒤에는 수많은 작은 기업들과 글로벌 파트너, 그리고 실리콘밸리와의 교류가 있었다. 삼성전자의 미래는 기술이 아니라 공존 가능한 생태계를 얼마나 정교하게 디자인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