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3500억원 주느니, ‘관세’내는게 낫다”

美 딘 베이커의 조언을 듣고보니

2025-09-15     박경만 편집위원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트럼프에게 줄 돈 3500억불(500조원)이 있으면, 그냥 관세 내고 자국 수출기업 지원해라”-. 미국 싱크탱크(CEPR) 설립자 딘 베이커 경제학자가 쏟아낸 말이다. 우리가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하지못했던 말이다. 300여 명 우리 노동자들이 가혹한 처사를 당하며 미 이민당국에 구금된 현실에도, 국민들 다수는 속으로 분을 삭여야 했다. “이런 대접받을 바엔 판을 뒤집는게 낫다” 싶기도 했지만 생각만으로 그쳐야 했다. 자칫 ‘반미(反美)’로 몰릴까 찜찜하기도 하고, 한국의 새 정부를 ‘책봉’하듯 하는 트럼프 정권의 험상궂은 위세도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다름 아닌 미국의 유명한 학자가 “그런 돈 있으면 너희 나라 기업 키우는게 훨씬 낫다”고 한 것이다. ‘울고싶은데 뺨맞은 격’이랄까. 속시원하기도 하고, 우리 처지를 그토록 이해해주는 미국인도 있나 싶어 새삼스럽다. 공식적 언어로 표출되지 않았을 뿐, 국내 일각에도 이미 그런 생각이 적잖게 스며있다. 기실 트럼프 대통령의 특이한 페르소나를 감안하면 베이커 말에 더욱 공감이 갈 수 밖에 없다. 베이커는 “(투자와 관세에 최종 합의를 한다고 해도) 트럼프 대통령은 언제든 말을 바꿀 것”이라고 했다. “그와 비즈니스를 해 본 동료들이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라고도 했다. 하긴 ‘마가(MAGA)’ 진영에 맞선 또 다른 진영의 미국인들에게 트럼프 행정부는 몰상식과 무도함의 표상으로 치부되고 있다.

내치(內治)와 외교, 국제무역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그 어떤 정부와도 다른 ‘일탈’을 보이고 있다. 이민정책이나, 일론 머스크를 수장으로 내세웠던 DOGE(정부효율부)에서 보듯, 비(非)민주적인 ‘단일 행정부 이론(Unitary Executive Theory)’으로 미국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미 헌법이 “행정권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했으므로, 대통령이 행정부 전체를 완전히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행정부를 통괄하되, 견제와 균형을 바탕으로 조화로운 리더십을 펼쳐야 한다는 자유주의적 권력분점 따윈 안중에 없다. 그렇다보니 ‘헌법적 강경주의’를 무기로 한 ‘독재의 평범성’이 횡행하는 곳이 지금의 미국이다.

흔히 권위주의 정권은 헌법(규범)을 따르긴 하지만, 그 정신을 교묘하게 훼손시킨다. 민주 사회 본연에 충실한 정치가 아니라, 법을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곤 한다. 언필칭 욕망을 자유롭게 성취하는 권력은 곧 병리적 동기에 종속된 ‘독재’라고 했다. 적대적 수사법과 이분법적 위기의식을 과장한 ‘구원자’ 행세 따위가 그것이다. 적어도 외관으로 본 트럼프 행정부가 이와 닮은 모습이다. 그런 ‘내치’에서 보인 트럼프의 태도는 국제사회에 대해선 더욱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된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법규나 관습따위는 무시해버린다. 세계 공화주의적 약속과 연대도 관심없다. 인류 보편의 공존공영의 정신도 트럼프의 수첩에선 찾아볼 수 없다. 자신과 미국의 욕망 앞에서 WTO 체제따윈 그저 장애물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노동자 구금 사태는 트럼프 정부의 모순된 욕망들이 서로 충돌한 사건이다. 동맹국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미국에 돈을 쏟아붓고 공장을 짓게 하고픈게 트럼프의 욕심이다. 그러나 이는 이민자 단속·추방이란 ‘마가’ 세력의 요구와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스티븐 밀러 백악관 부비서실장 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런 자기분열적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서일까. 우리 노동자들이 구금에서 풀려나자마자 상무장관 러트닉은 “(3500억달러) 투자에 서명하든가, 관세 25%를 내든가 하라”며 빚독촉하듯 옥죄고 나섰다.

그러나 이번 구금 사건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기회’일 수도 있다. 양국 간 비대칭적 거래에 새삼 질문을 던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베이커의 셈법은 그래서 귀담아들을 만하다. 미국이 우리에게 상호관세 25%를 다시 매기면, 대미 수출은 약 125억 달러 감소한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0.7%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125억 달러의 수출을 지키기 위해 3500억 달러를 내야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베이커 말대로 차라리 수출 감소로 피해본 노동자와 기업에게 그 돈을 지원할 법도 하다. 물론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으로 정확한 검증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금액의 20분의 1만 써도 한국이 훨씬 더 유리할 것”이란 그의 말이 솔깃하게 와닿는 까닭이다.

그러면 한미동맹과 안보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지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도 베이커는 ‘트럼프의 성격’을 몰라서 그런다고 했다. 오직 ‘미국 우선주의’와 장삿속에 충실한 트럼프가 “중국 군사 행동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미친 것”이란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직도 ‘미국 우선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느냐”며 결국은 “중국과 어느 정도 타협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를 100% 신뢰하지 않더라도,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기류에선 분명 또 다른 ‘신호’가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항소심 판결에 이어 대법원마저 상호관세를 불법으로 판단할 경우, “기존의 모든 무역협정이 폐기될 수 있다”고 했다. 되짚어보면 급한 쪽은 미국이다. 법원의 상호관세 위법 판결뿐 아니다. 내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뭔가 ‘업적’을 남겨야 하는게 트럼프의 처지다.

이 즈음 우리도 다시 ‘전열’을 재정비, 원점에서부터 따져볼 기회라고 할까. ‘투자 수익의 90% 미국 몫’이란 약탈적 요구를 결코 수용해선 안 될 것이다. 국내 기간 산업 시설을 통째로 미국으로 이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럴 바엔 베이커 말대로 ‘관세 25%’를 내는게 낫다는 판단이 설 법하다. 일본의 이시바도 대미협상을 서두른 바람에 실각했다. “한국 돈은 탐나지만, 한국은 필요없다”는 트럼프에게 다시 따져봐야 한다. 이를 공론화해준 미국 학자 베이커가 그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