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코리아타운의 한 상가 건물 앞에 1일 주 방위군이 배치되고 있다,
LA 코리아타운의 한 상가 건물 앞에 1일 주 방위군이 배치되고 있다,

[LA=미주헤럴드경제 황덕준 기자] 1992년 4월 아메리칸드림의 살아있는 현장으로 활성화되던 로스앤젤레스(LA) 한인커뮤니티는 자다가도 벌떡 깨는 악몽같은 현실을 겪었다.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을 과잉진압한 경찰에 항의하던 시위대가 코리아타운을 덮치면서 상점을 불지르고 약탈하는 폭동으로 변질됐다.

삶의 터전이 잿더미가 되는 순간에 공권력은 속수무책이었다. LA경찰들이 코리아타운의 폭도를 내버려두고 부자동네라는 인근 베벌리힐스 쪽을 ‘철통같이’ 방어하는 어이없는 현실 속에서 한인들은 스스로 자위권을 행사할 수 밖에 없었다.

한인방송 ‘라디오코리아’가 24시간 피해상황을 중계하고 한인들의 동선을 길잡이하는 상황실 역할을 하면서 코리아타운의 한인상가 곳곳은 캘빈 소총으로 무장한 한인 자경단의 생사를 건 방어막이 됐다.

미 합중국 대통령이 직접 발길을 들일 만큼 당시 LA한인들의 자구 노력은 안팎으로 눈물겨운 에피소드를 셀 수 없이 쏟아냈다. LA한인들 사이에선 ’4·29폭동’으로 불리는 그날의 악몽은 해마다 찾아오는 기념일마저 달갑지 않을 만큼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쓰라린 상처로 남았다.

그로부터 28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 LA한인사회는 타인종 커뮤니티, 특히 흑인과 라티노 사회와 긴밀하게 접촉하며 교류를 넓히는 데 힘을 쏟았다. 가난한 흑인 동네에서 리커스토어 등으로 돈을 벌면서 말도 섞지 않으려한다는 ‘어글리 코리안’의 이미지를 씻어내려 했다.

한편으로는 LA 시정부와 경찰국 등 행정 사법기관들과 교류를 강화하는 노력을 펼쳤다. 정치인과 경찰을 상대로 각종 기부와 자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문화원은 LA경찰들을 초청해 해마다 한식체험 등 한국문화 알리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문화적 이질감에서 비롯되는 사소한 오해가 빚어내는 갈등을 예방하자는 취지였다.

어느덧 한인사회의 행사와 모임에 LA시 정치인과 행정가, 경찰관, 소방관들이 섞이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워졌다. 그 사이 한인 최초의 시의원(데이빗 류)도 나올 정도로 이른바 ‘정치력 신장’의 가시적 효과도 나타났다.

어제 오늘 미국사회는 또 다시 재현된 경찰의 흑인 과잉진압으로 소용돌이치고 있다. LA경찰관들의 흑인에 대한 가혹행위로 촉발된 LA폭동을 잊을 수 없는 한인들은 몸서리칠 수 밖에 없다. 잊을 만하면 일어나는 미국경찰의 잔혹행위가 항의와 시위로 번질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이번에는 28년전과 엇비슷한 상황으로 전개돼 더욱 긴장하고 경계하는 분위기다.

LA시 한복판에 자리잡은 한인타운인 만큼 시위대가 언제든지 몰려올 수 있고, 그에 편승한 약탈꾼이 활개칠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비상사태로 2개월 반 동안이나 개점휴업하던 한인타운의 식당과 소매점은 영업이 허용됐음에도 ‘폭동의 위험’ 때문에 아예 문을 닫아걸어버렸다.

6월의 첫날 LA한인회와 상공회의소 등 11개 한인단체는 시의회, 경찰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영상회의를 갖고 ‘비상사태 대비 태스크포스’를 운영하기로 했다. 단체별로 만일의 사태 전후에 할 일을 나눠 맡았다.

이날 오후 LA한인타운 곳곳에 완전무장 군복차림의 주 방위군이 배치됐다. LA한인단체 협의회가 시 당국과 경찰측에 한인타운 경비를 위해 방위군 투입을 요청해 이뤄진 일이다. 하루 전 시위대와 무관한 약탈꾼 몇명이 한인타운 상점 대여섯곳을 파손할 때 신고를 받은 LA경찰이 신속하게 경찰차를 출동시켰다.

LA 경찰 관계자는 “우리가 한인을 지킬 것”이라며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1992년 LA 폭동 사태를 돌이키며 “그때와 다르다. 우리가 이제 한인들을 보호할 것”이라며 “한인들은 약탈과 방화를 막기 위해 자체 무장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강조했다.

LA한인회 로라 전 회장은 “한인사회가 그동안 LA 행정당국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어왔다”며 “LA경찰과 카운티, 시 관계자 모두 한인타운의 안전과 한인의 신변 보호를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을지언정 덧나지 않게 하려는 LA한인사회의 노력은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슬기로운 이민생활’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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