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북경화쟈대학교 겸임교수

박춘태 북경화쟈대 겸임교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인류의 재앙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인류를 위협하는 하나의 바이러스 때문에 전세계가 초긴장을 하고 있다. 2019년 12월에 발생한 코로나19가 해를 넘어서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로 확산됐다. 더욱 우려할 점은 그 전염 속도가 무척 가파른데다가, 인류 전체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데 있다. 이로 인해 많은 국가가 국가봉쇄령 또는 국내봉쇄령을 취하기에 이르렀다. 미래를 예측하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 호주 등 일부 국가의 마트에서는 사재기 현상이 이뤄지는가 하면, 사회적 혼란을 틈타 가짜 뉴스의 양산, 은행 강도 침입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사회구조적 교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아울러 유럽에서는 한국인을 비롯해 아시아인들이 인종 차별로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대수롭지 않은 일 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비와 갈등을 부추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시아인 모두를 마치 코로나19의 전파자인 것처럼 매도하거나 과잉일반화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발상이다. 현 시점에서 인류는 공존·공영해야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하며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개인 간 이해와 협력, 사회적 거리 유지, 국가 간 긴밀한 공조가 필요하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인종 차별은 코로나19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민족·국가 간 갈등·충돌만을 야기할 뿐이다.

바이러스 발생 초기에는 중국, 한국 등 대부분 아시아 국가에 한정돼 증가 추세가 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이 확산일로에 있다. 유럽에서의 대대적 확산이 이토록 심할 줄은 미처 몰랐다. 유럽 국가에서 바이러스의 가파른 증가는 정부의 잘못된 지침에 의한 영향도 있지만, 국민들이 마스크 착용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기인한다. 유사한 사례를 필자가 거주하는 뉴질랜드에서도 볼 수 있다. 뉴질랜드는 인구 구성 비율로 볼 때 약 85%가 유럽인으로 구성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식 문화와 전통이 많이 스며들어 있다. 뉴질랜드의 공원이나 도로를 걷다보면, 산책 또는 조깅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과 달리, 산책이나 조깅하는 사람들은 겨울에 세찬 바람이 불어도 결코 마스크를 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호흡기 질환이 있어도 마스크를 착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몇 년 전 필자가 겨울에 마스크를 쓰고 산책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같이 산책하던 뉴질랜드 현지인들은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며, 마스크 착용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듯 했다. 그 이유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얼굴을 가리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습관 때문인지 뉴질랜드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국가봉쇄령이 내리기 전,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스크 쓴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스크를 구입하려는 구매자는 많았지만.

어떤 전략을 만들어 승리하는 조직이나 사람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어떤 고정관념나 어떤 편견이 없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다가오는 상황을 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렇다. 불패란 바로 변화를 인정할 때 이뤄진다. 이를 물의 흐름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흐르는 물은 주변 형세에 따라 그 흐름과 몸체를 시시각각 변화시킨다. 이는 전략을 상대에 따라 방법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물은 자신의 모습을 고정하지 않기에 어떤 그릇에도 담길 수 있다. 돌덩어리나 바위가 있으면 돌아갈 줄 알 듯, 무한한 모습으로 변화하며 자신의 물줄기를 바꾼다, 바로 물의 적응력이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공유 가치’ 및 ‘인식도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마스크 미착용 태도는 결코 합리화 할 수 없으며 유연한 대처가 아니다. 독불장군이 없다. 펜데믹 상황에서 문화차이, 개인주의적 성향 또는 법적 의무가 아님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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