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식의 '북한산 산책'
본지 객원기자 겸 자유기고가

북한산 족두리봉
북한산 '족두리봉'

2020년,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희망찼다. 새해가 희망찬거야 별스러울 게 없지만 올해엔 새로운 10년을 들먹이며 여느 해보다 신년 분위기가 활기 넘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새해의 맛을 채 만끽하기도 전에 심상찮은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 발 우한 폐렴이라는 신종 바이러스가 처음 출현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우리나라를 국가적으로 고립시키고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을 줄 몰랐다.

중국이 공식명칭 ‘신종코로나19’로 홍역을 치르며 발원지를 통째로 봉쇄시키는 초강수 대처 후 확산이 둔해질 무렵, 뜻하지 않게 우리나라가 ‘신천지’라는 이단교도들의 집단 감염으로 된서리를 맞았다. 슈퍼 전파자를 통하여 급속도로 퍼진 대구, 경북의 대규모 ‘코로나19’ 확진 환자 증가 사태가 대한민국의 경제 및 사회 전반에 미친 악영향은 실로 참담했다.

이어 유럽, 중동, 미국은 물론 남미까지 전 세계를 강타해 결국 ‘세계보건기구(WHO)’에서 1968년 ‘홍콩독감’,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에 이어 지난 11일, 세 번째로 전염병 경보 단계 중 6단계인 최고 위험 등급 ‘감염병 세계 유행(팬더믹)’을 선포했다. 그 여파로 스페인, 포르투갈, 모로코 여행을 취소한 필자는 출퇴근을 제외한 약 한 달간의 은둔을 깨고 시민들의 동향을 살필 겸 북한산 등산에 나섰다.

 

 “코로나19의 와중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와 산수유가 무심히 노란 꽃을 피웠다.

성질 급한 수종은 벌써 새순이 돋기 시작했고, 양지바른 곳에서는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목련도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자연의 섭리에 감탄

불광역에서 출발하자마자 산 초입에 자리한 바위를 보며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길어지는 두문불출이 답답했는지 생각보다 많은 등산객들이 산을 찾았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더니 ‘코로나19’의 와중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와 산수유가 무심히 노란 꽃을 피웠다. 성질 급한 수종은 벌써 새순이 돋기 시작했고 양지바른 곳에서는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목련도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사실 집을 나설 때는 ‘코로나19’에 대한 우려로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밀폐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고 탁 트인 산에 오르는 것이니 괜찮을 거라는 나름의 합리를 내세우며 한 발 한 발 오르다보니 근심은 사라지고 시나브로 산 기운에 젖어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산 입구에서부터 확연히 다른 공기, 사철 푸른 나무가 많아 겨울에도 생기를 잃지 않는 북한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이 산의 매력에 푹 빠지게 한다. 추운 겨울을 묵묵히 견디고 이제 막 봄 맞을 채비를 끝내고 새 잎을 틔우려는 나무들과 이 난국의 시절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우는 이름 모를 야생화들을 보니 신비한 자연의 섭리에 가슴이 뜨거워지며 새로운 힘이 불끈 솟아난다. 그래서인지 등산객들의 모습도 바깥에서 보는, 마스크에 잔뜩 가려 어두운 표정이 아니고 전염병 걱정 따위는 아예 잊은 듯 맑고 밝아 보인다.

마음을 활짝 열고 바위가 많아 때론 거북이걸음으로 기어가듯이 오르기를 얼마인가, 탁 트인 시야에 펼쳐진 전경이 장관이다. 방금 전 여기를 오는 차 안에서 매일 동네 앞산을 가면 됐지 굳이 먼 산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공기며 전경이며 이 웅장한 북한산을 감히 동네 산에 견준 경솔함에 대하여 “북한산아, 미안하다!” 하고 정중히 사과했다. 필자는 자연에게도 예의는 지켜야하고 잘못을 깨달았을 땐 쿨하게 인정하자는 주의이니까...

족두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높이 367.3m의 족두리봉을 비껴 한참을 지난 큰 바위 앞을 지나려니 여러 사람들이 암벽등반 훈련을 하고 있다. 긴 겨울을 보내며 저들은 얼마나 오늘을 기다렸을까? 로프에 몸을 매달고 암벽화 신은 발을 디디며 바위를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심스런 가운데 기운차다. 수없이 반복했을 그들의 피나는 훈련은 건너뛴 채 겁 없이 그 대열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힘듦을 견뎌내며 훈련하고 있는 암벽 등반가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발걸음을 옮긴다. 햇볕도 응원하듯 그들의 등으로 따뜻하게 내리쬔다.

북한산에 핀 '산수유꽃'
북한산에 핀 '산수유꽃'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

그렇게 한참을 오른 후, 앞이 훤히 트인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저 멀리 손바닥만하게 고물고물 자리한 아파트며 빌딩들이 다 부질없어 보인다. 마음 안, 물욕을 밀어낸 자리에 순수함이 머물렀는지 불과 얼마 멀지 않은 곳인데 지금 이 순간만은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 이래서 산 속에 은둔하며 살면 욕심도 버리고, 마음도 비워지며 절로 도인이 되는가 보다.

전망 좋은 곳에서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북한산에 온 선물로 평소에 삼가는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마시다보니 아이들이 어렸을 적 자주 찾았던 20여 년 전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약수터를 찾아 약수를 받아 마시던, 막내아들은 너무 어려 등산용 아기캐리어에 업고 산을 올랐던, 갑자기 비를 만나 조난을 당할까봐 겁에 질려 서둘러 내려왔던 기억의 조각들...

잠시 풀었던 짐과 감정을 차곡차곡 접어 넣고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섰다. 바위로 덮인 길을 내려올 땐 꼼짝없이 네 발로 기어가듯 걸어야 하지만 수년 전 설치되었다는 지지대를 잡고 한결 수월하게 내려왔다. 이럴 때 자연보존과 편리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두어 시간 걸었을까. 돌담이 드리워진 사이로 문이 나있는 ‘탕춘대성’이 나온다.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을 연결해 도성과 외곽 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성한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북한산 비봉 아래까지 길이가 약 5.1Km에 달했으나 조선 후기 혼란기에 모두 훼손되고 1977년 홍지문과 일부 구간만 복원되었다니 아쉬운 마음이다.

북한산이 바위에 쌓인 건지, 바위가 북한산에 쌓인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서로가 하나 되어 웅장한 산의 경관을 여유롭게 감상하며 내려오자니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던 고은 시인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란 시가 마음에 와 닿았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시공간은 달라도 그저 앞으로만 치닫느라 옆, 뒤 살필 겨를 없이 살다가 황혼이 가까워서야 지나온 날들을 천천히 꺼내어 되새겨보는 것처럼...

 

“이제는 애써 희망을 가져야할 때,

여전히 자연은 순리대로 새싹을 피우고

봄은 우리 앞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으니까...”

 

북한산 인수봉에서 암벽등반중인 산악인들.
북한산 인수봉을 오르는 암벽등반가들

암벽등반가와 어우러진 바위산

장미공원 방향 하산을 끝으로 세 시간여 동안 약 1만 오천 보를 걸으며 북한산 등반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 오늘을 계기로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북한산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1983년 도봉산 일대와 묶어 78.5㎢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산은 높이가 837m로 강북구, 도봉구, 성북구, 은평구, 종로구를 비롯하여 경기도 고양시, 양주시, 의정부시에 걸쳐있다. 화강암 형태의 백운대를 중심으로 남쪽의 만경대, 북쪽의 인수봉이 삼각형으로 놓여 있어 삼각산으로도 불렸다.

삼국시대 때 백제가 도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이후 신라, 고려에 이르기까지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던 사적 제162호 북한산성과 14개의 성문 중 대남문, 대서문, 대성문, 보국문, 용암문이 남아 있다. 승가사의 마애불좌상, 태고사 원증국사탑비 등 보물과 진흥왕순수비유지등 많은 유물과 사찰, 인수봉, 노적봉을 비롯한 수십 개의 봉우리가 있다. 또한 울창한 나무숲은 동식물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으로 오소리와 흰 족제비 등의 다양한 동물과 나도국선나무, 미선나무 군락 등 희귀식물이 살고 있다.

북한산은 서울에서 가장 높고 큰 산으로 경관이 수려하고 접근성이 좋아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산 중의 하나이며 특히 암벽 등반가들이 훈련을 위하여 즐겨 찾는 산이기도 하다. 이렇듯 많은 유물과 유적은 물론 아름다운 자연 환경까지 갖춘 산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산세가 험준하다 생각하여 지레 겁을 먹고 갈 엄두도 못내는 사람들이 많지만 요즈음은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어 자신에게 맞는 노선을 찾아 편안한 마음으로 산을 즐기며 걸을 수 있다.

‘코로나19’의 위세에 눌려 각종 행사나 모임이 취소되는 등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움츠러들지 말자. 아무리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유행한다 해도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니 개인위생을 철저히 지키고 조심은 하되 너무 공포에 떨지 말자. 어깨를 활짝 펴고 사방이 탁 트여 감염의 위험성이 적은 북한산 산행을 시도해보자. 이제는 애써 희망을 가져야할 때, 여전히 자연은 순리대로 새싹을 피우고 봄은 우리 앞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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