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 100조 시대 연 불세출의 기업인 ‘신격호’ 별나라로...
한일 양국 기업, 재벌 반열 올려놔
껌으로 시작, 유통공룡 그룹 일궈
상호 ‘롯데’, 일생 최고 아이디어
형제의 난으로 초라한 말년 보내

신격호 전 롯데그룹 명예회장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현해탄을 넘나들며 70년 만에 한국 재계 5위, 매출 100조원을 올리는 롯데그룹을 키워낸 신격호(辛格浩) 롯데 명예회장(이하 회장)이 지난 2월19일 9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갔다.

이로써 최근 세상을 떠난 김우중 전 대우그룹 창업주의 사망으로 사실상 국내 재계 주요 그룹의 ‘창업주 세대’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됐다. 얼마 전에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도 유명을 달리해 2019년과 2020년 사이 재계의 주요 인물들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일본으로 건너 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껌 장사’를 시작한 신 회장은 회사 창립 70년만에 한일 양국에 롯데 왕국을 세웠다.

1922년 경남 울주군에서 5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교육열이 강했던 부친 밑에서 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종축 기사로 취업했다가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1941년 일본행 관부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생계를 생활전선에 뛰어들었고, 도쿄에 다다미방을 얻고 우유배달은 물론 막노동과 사우나 등을 전전하며 돈이 되는 일이면 어떤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사업에 눈을 뜨게 됐다.

1948년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처럼 사랑받는 기업을 만들겠다”며 도쿄에서 껌 제조사 ㈜롯데를 창업하면서 ‘롯데 신화’의 막을 올렸다.

껌 장사로 시작해 대박을 친 뒤 초콜릿(1963년)·캔디(1969년)·아이스크림(1972년)·비스킷(1976년) 등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일본 굴지의 종합 제과기업으로 입지를 굳혔다. 창업 40년도 채 되지 않은 1980년대 중반 이미 롯데는 일본에서 롯데상사, 롯데부동산, 롯데전자공업, 프로야구단 롯데오리온즈(현 롯데마린스), 롯데리아 등을 거느린 재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훗날 신 회장은 “롯데라는 신선한 이미지를 바로 상호와 상품명으로 택한 내 결정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 수확이자, 걸작 아이디어다”고 회고할 만큼 자신의 ‘작명’에 만족했다.

“신격호는 시대에 맞는 상품개발과 수요를 기민하게 읽을 수 있는 시장 파악력, 상품광고 카피의 교묘함, 사회적 인기를 얻고 재빨리 제품화 하는 감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재일한국기업인>의 저자인 나가노 신이치로 교수의 설명이다.

일본에서 어느 정도 사업이 자리를 잡자 신 회장은 고국으로 눈을 돌렸다. 1959년부터 한국에서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세워 껌· 캔디·비스킷·빵 등을 생산하다가 1967년 4월 자본금 3,000만원으로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이어 1974년과 1977년 칠성한미음료, 삼강산업을 각각 인수해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사명을 바꾸면서 국내 최대 식품기업의 면모를 갖췄다. 신 회장은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뤄내야 한다”며 1973년에는 지하 3층, 지상 38층, 1,000여 객실 규모의 소공동 롯데호텔을 선보였고, 1979년에는 소공동 롯데백화점을 개장하면서 유통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이어 비슷한 시기 신 회장은 평화건업사 인수(1978년·현 롯데건설), 호남석유화학 인수(1979년·현 롯데케미칼) 등을 통해 건설과 석유화학 분야에도 발을 뻗었다. 식품-관광-유통-건설-화학 등에 걸쳐 진용을 갖춘 롯데그룹은 1980년대 고속 성장기를 맞았고, 기네스북인 인정한 ‘세계 최대 실내 테마파크’ 서울 잠실 롯데월드도 1989년 문을 열었다. 신 회장은 1990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집계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에 오르기도 했다.

1990년대에도 신 명예회장은 편의점(코리아세븐), 정보기술(롯데정보통신), 할인점(롯데마트), 영화(롯데시네마), 온라인쇼핑(롯데닷컴), SSM(롯데슈퍼), 카드(동양카드 인수), 홈쇼핑(우리 홈쇼핑 인수) 등으로 계속 사업 영역을 넓히며 롯데를 재계 서열 5위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신격호 시대’는 두 아들의 경영권 다툼으로 초라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신 회장은 故 노순화, 사게미쓰 하츠코, 서미경 씨 등 총 세 명의 부인을 뒀다. 1970년 사망한 노순화 여사 사이에는 장녀 신영자(73) 롯데복지장학재단 이사장이 있다. 신 회장은 노씨와 결혼을 한 상태에서 1941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주인 딸인 다케모리 하쓰코와 1950년 중혼을 한 뒤 신동주·신동빈 형제를 낳았다. 서미경씨(55)와 세 번째로 결혼해 슬하에는 딸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32)이 있다.

신 회장은 당시 하쓰코와 결혼하면서 그의 외삼촌 성씨를 따 시게미쓰 다케오로 창씨 개명을 했고, 부인 역시 남편 성을 따른다는 일본의 관습에 따라 시게미쓰로 성씨를 바꿨다. 타국에서 사업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일본 명문가의 사위가 된 것이다. 일본으로 귀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국내에선 ‘롯데는 일본기업’이라는 인식을 심게 한 배경이 됐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신동빈 회장은 스스로 일본이다”며 “뼛속까지 일본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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