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R칼럼/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미국의 에너지 기업인 엔론(Enron)은 한때 포춘지가 선정한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중 1위에 오른 바 있고,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으로 6년 연속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향후 10년간 주식이 꾸준하게 오를 기업’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명성은 ‘분식회계’라는 숫자놀음으로 쌓아 올린 허명이었다. 엔론은, 2001년 만천하에 드러난, 미국 역사상 최악의 분식회계 비리로 파산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분식회계 규모는 무려 38억 달러에 달했으며, 최대 피해자는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 증권을 보유한 엔론의 주주들이었다.

엔론 파산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지만, 지배구조 문제로 압축된다. 엔론 사태 이후, 기업의 투명경영에 대한 사회의 요구가 높아졌고 미국은 그 일환으로 기업회계의 투명성을 골자로 한 개혁법인 ‘사베인스-옥슬리법(Sarbanes-Oxley Act)’을 2002년 7월 도입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최고재무경영자가 사업보고서를 확인·검토한 후 인증서명을 하도록 하고, 감사인이 내부통제 프로세스에 대해 인증하고 날인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감시와 견제 기능을 상실한 지배구조에 있었다. 엔론 파산은 대리인 딜레마(agency dilemma)가 초래한 가장 심각한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개인 또는 집단이 이해가 걸린 의사결정 과정을 타인에게 위임할 때 주인(Principal)과 대리인(Agent) 관계가 성립한다. 모든 계약관계에는 이 관계가 일반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주주와 경영진, 고용주와 노동자, 소송의뢰인과 변호사, 더 나아가 국민과 국회의원(혹은 관료)과의 관계 등이다. 대리인 이론을 최초로 주장한 젠센(M. Jensen)과 메클링(W. Meckling)에 따르면, 주인과 대리인은 이해관계가 완전히 같지 않으며, 정보의 불균형과 감시의 불완정성 등이 존재해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나 무임승차, 역선택의 문제가 상존한다. 대리인은 정보의 비대칭성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엔론의 회계부정 스캔들은 전문경영인이 자신의 자리를 연장시키고 더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해 실적을 조작한 사건이다. 즉 경영진이 기업의 주인인 주주의 이익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챙기면서 일어났다. 엔론의 경우는 주주와 경영진 사이에 대리인 비용, 즉 대리인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비용이 천문학적 크기로 발생했고, 그 비용의 결과는 파산이었다.

대리인 딜레마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는 힘들지만 최소화 시킬 수는 있다. 주인과 대리인의 이해를 일치시키는 방식이 통상적인데, 스톡옵션(stock option)이 대표적이다. 시장을 통한 상시적 감시나 관련 법·제도 마련과 정비 등을 통해서도 대리인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엔론은 주주들의 감시가 느슨했다. 당시 미국은 개별기업의 경영에 크게 개입하지 않은 인덱스 펀드의 영향력이 증대되어 주주 등을 통한 시장 감시와 견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주주 감시 소홀은 엔론 경영진 권력의 비대화로 이어졌고, 그들은 ‘슈퍼스타 경제학’이라 불릴 정도로 천문학적인 보수를 챙겼으며, 엔론은 파산했다.

전세계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수탁자 책임을 위한 기관투자자의 행동지침인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는 주주의 시장 감시 시스템을 강화하는 제도라 할 수 있다. 2010년 영국이 최초로 도입한 이래 현재 22개 국가로 확산되었다. 우리나라도 2016년 말 도입했고, 현재(2월21일 기준) 73개의 기관투자자들이 코드에 가입했거나 도입의향서를 제출한 상태다.

사실 우리나라는 주주들에 의한 감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 중 하나다. 기업에서 경영진을 견제하는 기능을 하는 이사회는 거수기에 불과하고, 독립적이라는 사외이사는 결코 독립적이지도 않다. 외관상으로만 독립적일 뿐 깊숙한 곳에서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들러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기업의 지분을 소유한 기관투자자들이 주주로서 기업가치 제고를 위해 적극적으로 기업관여(engagement)에 나서 감시와 견제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동안 무관심했다.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경영진 안건에 대부분 찬성했다. 국내 3대 연기금인 국민연금, 사학연금, 공무원연금의 주총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반대율은 지난해 기준으로 20%대를 넘지 못한다. 사학연금은 1.71%에 불과했다. 자산운용사와 증권사 등 민간 기관투자자들의 반대율은 1% 미만이다.

우리나라에서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는 2003년 허용이 되었고, 2008년 2월에는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이 만들어 졌다. 그럼에도 기관투자자들은 경영진 안건에 대한 반대는 차지하고 의결권 행사 그 자체마저 소극적이었다. 선거로 치자면 투표 자체를 안했다는 말이다. 2013년 자본시장법 개정을 통해 의결권 행사 충실의무를 명시하고 찬반 사유도 공시하도록 강화한 이유다. 그러나 의결권 행사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대기업의 계열사이거나 금융지주사의 계열사인 경우가 많고, 피투자기업과의 거래관계(사업관계)로 얽혀 있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해상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기관투자자들이 의결권 등 기업관여를 소홀히 한 사이, 대우조선해양의 분식회계, 강원랜드의 대규모 채용비리 등 기업가치를 떨어뜨리는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이러한 일들은 대리인 문제로, 대리인 비용을 증가시키는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관투자자들은 사건 발생 전이나 후에도 기업의 주인으로서 이 대리인 문제와 비용을 해소하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거의 수수방관해 왔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로 하여금 이해상충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기업관여를 통해 대리인 딜레마로 발생하는 대리인 비용을 효과적으로 줄이는 제도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기관투자자도 연금, 펀드, 보험가입자의 대리인이다. 때문에 기관투자자는 가입자의 수익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지속가능발전에도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기관투자자는 기업의 주주로서의 의무, 가입자(고객)의 대리인으로서 가지는 의무, 이 두 의무를 모두 방기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우리 기관투자자들은 미국의 최대 에너지 공룡 기업인 엔론이 파산했던 원인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외양간은 소를 잃어버리기 전에 점검해야 하고, 소를 잃은 후에도 고쳐야 한다.

우리는 지난 십 년 두 정권을 거치면서 대리인인 대통령과 관료들이 주인의 이익이 아닌 사익을 추구함으로써 국가가 얼마나 거덜났는지를 알고 있다. 주인의 목소리와 행동이 부재했을 때 주인의 삶이 얼마나 앙상해지고 피폐해졌는지도 경험했다. 또한 촛불혁명을 통해 객(客)이 아닌 주인(主人)으로서의 정당한 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체험했다. 이 변화를 일구는데 우리는 천문학적인 대리인 비용을 지불했다. 대리인만 세워 놓고 주인으로서 감시와 견제를 소홀히 한 비용이다.

3월은 주주총회 시즌이다. 주총은 주주가 대리인으로부터 한 해 동안 쌓은 경영실적은 물론 향후 경영전략을 보고 받고 인준 받는 자리다. 또 이사나 감사 등 대리인들을 선임하고 주주로서 안건을 제안을 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이는 의결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의결권은 선거에서의 투표권이다. 때문에 의결권 포기는 선거의 투표권 포기와 같다. 그 결과로 자신의 이해만 챙기는 대리인이 선임된다면 주인의 이익은 그만큼 피해를 본다. 의결권은 ESG 즉 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을 고려해 찬반을 행사했을 때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올해는 2016년 말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가 실질적으로 적용되는 해라고 할 수 있다. 기관투자자들이 의결권을 얼마나 충실히 행사할지, 또 기업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경영진 안건에 대한 얼마나 반대표를 행사할지 세인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이유다.

민주주의는 완성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하루의 이벤트식 선거로 민주주의에 참여했다고 생각하는 주인은 큰 대리인 비용을 치룰 가능성이 높다. 마찬가지로 주총에서의 의결권 행사는 최소한에 불과하다. 기관투자자는 ESG에 기반해 상시적으로 관여해야 한다. 주인의 지위를 인식하고 기업가치를 건설적으로 제고하는 감시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대리인은 주인의 말을 잘 듣게 되고 대리인 비용도 치루지 않거나 최소화 할 수 있다. 이는 칼바람에도 꺼지지 않았던 촛불. 그 촛불의 이루어 낸 혁명이 남긴 가르침이다. 또한 스튜어드십 코드의 정신을 이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3월 주총 후, 이러한 관점에서 기관투자자는 평가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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