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청년이여! 해외로 눈을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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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모자왕' 조병태 소네트 회장
‘글로벌’과 ‘네트워크’는 평생 화두
세계시장에서 모자 70억개 팔아
조선족 포용해 통일경제시대 대비
동포재단, 한상대회 간섭 말아야
조병태 소네트  회장
조병태 소네트 회장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글로벌 시장에서 꿈을 심어라”

60년대 조영식 전 경희대학원장은 청년학생들에게 4년 내내 강조했던 말이다. 원고도 없이 쏟아내는 그의 대중연설은 늘 청중을 감동시켰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 명확했고, 연설의 기본인 억양과 액션 등에서도 탁월했다. 이런 명연설에 감동을 받고 글로벌 시장의 중심인 미국으로 건너간 청년은 각고의 노력 끝에 전 세계 모자 시장을 석권했다. 세계한인무역협회(이하 월드옥타)회장을 지낸 조병태 소네트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조 전 학원장이 맨토”라고 밝힌 조병태 회장을 지난달 30일 롯데호텔에서 만났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1시간씩 조회를 했는데 ‘글로벌’과 ‘창조’, 그리고 ‘문화’를 강조하셨습니다. 당시 그의 명연설은 50년이 지났지만 한국의 미래와 청년의 미래를 정확히 짚어낸 것 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 전 학원장이 목이 터지라 강조했던 ‘글로벌’과 ‘네트워크’는 조 회장이 평생 비즈니스를 하면서 내건 화두였다. 그가 월드옥타 회장을 맡아 세계경제의 중심인 뉴욕에서 ‘제1회 세계한인경제인대회’를 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병태 회장 취임 전까지 월드옥타는 한인경제인들의 친목단체에 불과했지만 20년 만에 명실상부한 글로벌 경제인네트워크로 성장한 것이다.

학창시절, 조병태 회장의 꿈은 정치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교편생활을 했지만 정치가의 길은 녹록치 않았다. 미국으로 눈을 돌렸지만 미국에서도 역시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돈부터 벌어야겠다고 작정하고 모자회사인 ‘소네트’를 창업했다.

소네트는 기존의 프린팅이 아닌 수를 놓은 모자를 내놓으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소네트는 기존의 프린팅이 아닌 수를 놓은 모자를 내놓으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소네트는 1978년부터 10년 동안 기업의 광고를 모자에 새기는 판매 전략으로 상승곡선을 탔다. 이어 1985년부터 10년간은 모자 앞에 프린트 대신 뉴욕 양키스·LA 다저스 등의 팀 이름을 수놓아 판매하면서 활기를 띠었고 1996년부터 지금까지는 신축성 있는 첨단 기능성 제품인 ‘플렉스피트’를 개발해 ‘대박’을 쳤다.

현재까지 그가 만든 모자는 연간 전 세계시장에서 7000만개나 팔린다. 지금껏 70억이 넘는 지구촌 인구수만큼 팔렸을 거라는 조 회장의 추측이다. 모자에서 2억5000만달러, 부동산과 IT사업 등에서 5000만 달러 등 총 3억 달러의 회사로 키워 냈다.

올해로 미국생활 46년째, 그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문은 자신이 만든 소네트 모자가 지구촌 곳곳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과 월드옥타를 명실상부한 한상 대표단체로 만들었다는 자부심 등 크게 두 가지다. 월드옥타는 1981년도에 출범했지만 실제로는 조병태 회장이 수장(1997~1998)을 맡으면서 그 위상과 네트워크가 한층 강화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희대에 ‘조병태 강의실’

“1997년 10월 뉴욕에서 제1회 세계한인경제인대회를 열었습니다. 27개국 35개 지회에서 500명이 넘는 회원이 참석했는데 이때 처음 조선족 경제인들이 참석했습니다. 글로벌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고 조선족경제인들을 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문제는 당시 조선족 회원들에게 비자발급이 허용되지 않았다. 조 회장은 직접 상원의원들을 찾아가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단 한명이라도 이탈하면 책임지겠다”는 각서를 쓴 뒤 조선족회원 50명이 미국 땅을 밟게 했다. 당시만 해도 조선족을 포용한 국내 단체는 거의 없었다.

20년 전 중국은 미국과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G2국가로 세계2위의 시장이 됐다. 현재 월드옥타 내 조선족 경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30%에 육박한다. 월드옥타 지회도 홍콩과 마카오 지회를 포함해 23개에 이르고 있다.

조 회장이 조선족 회원유치에 열을 올린 것은 글로벌 비즈니스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통일경제시대를 대비하자는 취지도 적지 않았다. 그는 조선족을 포함해 미주동포기업들 상당수가 북한에 진출해 있다고 설명했다. 오는 10월 열리는 한상대회장에 월드옥타 지회장을 역임한 표성용 조선족기업가협회장이 선정됐다. 20년 역사를 가진 한상대회에 조선족 출신이 수장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조 회장이 거름역할을 했음은 불문가지.

“중국이 G2국가로 발돋움한데는 화상(華商)이 절대적 역할을 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디아스포라국인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미국시장의 70%를 유대인이 석권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대인 다음으로 화상, 인상(印商), 한상(韓商)이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족과 조선족경제인에 대한 삐딱한 시선을 거두고 이들을 포용해야 한국이 G4국가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조 회장이 월드옥타 회장을 맡기 전 월드옥타 10개 지회에 회원 수는 100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임기를 마친 1998년에는 전 세계 48개 지회에 회원 1200여명으로 증가했다. 2년 새 조직은 4배, 회원은 12배로 늘어났다. 글로벌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저는 한국이 북한보다 못 살 때 이민을 갔습니다. 미국에서 집을 사고 돈을 벌었습니다. 이 돈이 미국의 돈입니까. 아닙니다. 결국은 한국의 재산이 아닙니까. 한국청년들이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좁은 내수시장에 안주해서는 한국의 미래도 없습니다.”

조 회장은 모교인 경희대에 30년 넘게 장학금을 기부했다. 이런 공로가 인정돼 ‘조병태강의실’이 생겼다. 여기서 종종 후배들에게 글로벌시장과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설파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재를 출연해 비영리단체인 ‘LOVE’를 설립한 조 회장은 뉴욕한인경제인협회 회장과 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회장, 전미한미재단 총회장, 한상대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LA올림픽과 88서울 올림픽 때 핸드볼 국제 심판을 지내기도 한 조 회장은 최근 들어 재외동포재단이 한상대회 등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표명했다.

한상대회, 이제는 해외에서 할 때

“세계 화상대회는 중국이 아닌, 미국 싱가포르 등지로 돌면서 열고 있습니다. 글로벌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함이지요. 한상도 그럴 때가 왔다고 생각해, 2020년 한상대회는 세계경제의 중심인 미국에서 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대회장도 일본에서 40조의 거상이 된 한창우 마루한 회장의 동의를 받아 결정을 했는데 갑자기 동포재단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이를 틀었습니다. 올해는 결국 부산에서 개최하기로 했는데 아쉬운 점이 적지 않습니다.”

지난해 여수에서 열린 한상대회 비용은 재외동포재단이 13억원, 전남도와 여수시가 각각 3억원, 매일경제가 2억원 등 총 23억원이 소요됐다. 90%넘게 국민 세금이 투입됐다.

“한상대회의 주인은 한상입니다. 지금까지 한상대회장은 한상대회운영위원회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2년 전 한상대회장 선출 권한을 재단에서 위임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이제는 원상 복구해야 합니다. 재단이 예산지원을 한다고 해서 한상대회를 관료화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국내 대표적인 한인경제인대회는 월드옥타·연합뉴스 공동 주최의 ‘세계한인경제인대회’와 재외동포재단·매일경제신문이 공동주최하는 ‘한상대회’로 크게 구분된다. 대회 규모는 한상대회가 크지만 월드옥타는 전 세계 76개국에 146개 지회를 가진 풀뿌리 조직이다. 쉽게 말해 한상대회는 일 년에 한번 치루는 이벤트 행사다. 이로 인해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네트워크의 주도는 월드옥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그의 진단이다.

He is -..조병태

돌아다니는 광고판 모자로 세계시장 석권

28세인 1975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모자사업을 시작한 조병태 회장은 6개월간 영업을 다녔지만 공을 쳤다. 무려 500여개 업체를 돌아다녔지만 손에 쥔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죽 모자 5만개를 주문받아 납품했다가 모자에 곰팡이가 생기면서 20만 달러를 고스란히 빚으로 떠안아야 했다. 한 달 4인 가족 생활비가 고작 50달러이던 시대였다. 바이어를 찾아가 “반드시 빚을 갚겠다”며 영주권을 맡기고, 한국으로 돌아와 부모형제에게 돈을 빌려 급한 불을 껐다. 가죽 모자의 실패를 거울삼아 린넨(麻로 만든 모자)으로 바꿨지만 또 다시 그는 10만 달러라는 거금을 날렸다. 참담한 실패였다.

그러던 어느 날, 허드슨 강가에 자신이 서 있음을 발견했다. 자살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한참 울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지고 후련해졌다. 학창시절부터 스포츠맨으로 살아온 집념의 승부사가 바로 조병태 아닌가. 다시 신발 끈을 고쳐 맸다.

“뉴욕의 42번가 타임스퀘어 광장을 무심코 걷고 있는데 광고판이 눈에 번쩍 들어왔어요. 순간 모자를 광고판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모자에 말로 담배, 버드와이저 맥주, GM과 포드 등 자동차 회사의 로고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한마디로 대박을 친 것입니다. 2년간 진 빚을 다 갚았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향한 시작은 험난했지만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생기면서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프린팅 모자에서 자수로 로고를 새기는 방식으로 시장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했다.

특히 1982년 개발한 자수 모자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까지 이 회사의 효자상품이 됐다. 소네트의 자수모자에 대한 입소문은 빨랐다. 뉴욕 양키즈에 연간 60만개를 공급하는 등 메이저리그(MLB) 각 구단에 모자를 공급하면서 회사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농구, 미식축구, 하키 등 미국의 4대 스포츠 팀들의 모자는 물론 IBM, 나이키, 아디다스 등 다국적 기업의 브랜드 광고를 새긴 모자는 거의 소네트의 제품이다. 그냥 모자가 아닌, 광고 모자를 만들어 시장을 제패한 것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늘 경쟁이 있는 법. 이어 뒤가 막혀 있으면서도 누구나 편하게 쓸 수 있는 ‘플렉스피트(Flex Fit)모자를 개발해 다시 한 번 공전의 히트를 쳤다. 평소에도 그는 완벽한 시장조사를 통해 얻어낸 빅데이터를 이용한 비즈니스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여기에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늘 시장을 지배하고 주도했다. 원텐(One-Ten)모자가 대표적이다. 저가 중국산이 미국시장을 할퀴고 있는 가운데 어느 누구도 쉽게 따라 올수 없는 소네트만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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