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넘어 자선으로 어둠의 역사 뚫은 큰 스승
진주교대에 260억 기부한 거인
“恒産이 없으면 恒心도 없는 법”
미군공습으로 아내와 딸 잃기도
살해된 일본 경찰관에 익명으로
위로금 전달해 한일관계 수습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구로공단(현 구로디지털단지)조성에서부터 88서울올림픽과 IMF위기 등 굵직굵직한 현대사에서 재일동포들의 활약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자의든 타의든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동포들은 갖는 차별과 냉대를 뚫고 엔화를 벌어 모국의 경제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이 가운데 잊혀져서는 안 될 재일동포 기업가 20여명을 발굴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정환기 호박그룹 회장
정환기 호박그룹 회장

때는 1955년 8월 29일 오사카 히가시구의 도카이은행(東海銀行) 지점에 강도가 들어 경찰관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경찰은 법인으로 조선인 권(權)이라고 발표하면서 재일동포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다.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감정은 극도로 흥분된 상태였다. 하지만 일본 사회는 곧바로 진정됐다. 익명으로 30대 초반의 한 조선인이 경찰관 사망 위로금으로 100만엔을 기탁했다는 뉴스가 전파를 타면서 조선인에 대한 감정은 수그러들었다.

언론과 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기탁자는 故정환기 호박그룹 회장으로 밝혀졌던 것이다.

故 정환기 회장은 1924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에서 태어나 1927년 부모님을 따라 일본 나고야로 이주했다. 그의 부친은 건설노동자로, 어머니는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정 회장은 나고야시립 고다마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통신사에 입사한 뒤 야마요시(山善) 줄 공장으로 전직을 했다. 태평양 전쟁 와중에 결혼을 하면서 뜻하지 않게 장인의 가게를 넘겨받아 멸치와 미역, 까나리 등을 취급하는 장사에 첫발을 내 딛는다. 하지만 1945년 6월 미군의 대공습으로 아내와 5개월 된 딸을 잃고 말았다. 그간 모은 재산은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됐다. 이후 재혼을 한 그는 양복점으로 업종을 변경해 장사를 했지만 또 다시 거지신세가 전락한다. 히로시마 암시장에 기성 양복을 사러 갔다가 돈 가방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그간 자신이 입기 위해 만들어 놓은 양복 23벌을 내다 팔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그는 마쓰야 기계제작소, 마쓰야 전기제작소, 와카바자동차, 아즈마 교통, 고하쿠(琥珀)그룹을 일구면서 성공한 경영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부친에게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다”는 말씀을 수없이 듣고 성장했다는 정 회장은 평생 “신용은 국경을 초월한다”는 말로 사업성공의 비결을 꼽았다.

정 회장은 아이치현 최대의 재일동포 금융기관인 ‘아이치상은(愛知商銀)’을 설립하여 동포들의 기업 활동을 지원했고 나고야한국총영사관은 및 나고야민단회관 건립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늘 민족교육에 대한 목마름이 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고 한다. 이유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집 근처에 개설된 한글교실에 다니다가 목격한 사건 때문이다.

어느 날 경찰관이 교실로 들이닥쳐 “일본어라는 훌륭한 국어가 있음에도 일개 방언 따위인 조선어를 가르친다”며 마구잡이로 선생님을 구둣발로 걷어찬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2015刊 ‘자이니치리더’)는 그의 회고다. 1965년 관내 유일의 민족교육기관인 ‘나고야 한국학교’를 설립, 35년간 이사장을 맡은 배경이기도 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1억엔을 기부해 재일동포사회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던 그는 민단 나고야 본부단장, 아이찌켕 본부단장, 신한은행 감사, 신한은행 주주 간친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그는 모국으로 눈을 돌려 민족교육발전에 팔을 걷어 부쳤다.

진주교대
진주교대

1998년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만큼 큰 원동력도 없다’고 믿었던 그는 초등 교육이 곧 대한민국 교육의 시작이라며 미래 초등교사 인재 육성을 목표로 ‘가정 정환기 장학재단’을 설립한 뒤 2016년 타계할 때까지 대략 260억원 가량을 교육 사업에 기부했다.

장학 재단 설립 당시 정 회장은 “타국 일본에 살면서 어릴 때(3세) 떠난 고향 진주를 한 번도 잊어 본 일이 없었다”며 “고향 후학의 학문 활동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소망으로 여력이 있는 한 한국에 있는 대학을 도와야겠다고 다짐했다”며 재단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학술문화교류에도 관심을 가져 1993년 경상대학교 한일문화교류연구소에 5억원을 출연했으며 2006년에는 진주개천예술제 제향 초헌관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고향사랑도 빼 놓을 수 없는 치적이다. 1960년대 정 회장은 부친과 함께 고향을 방문했다가 초등학교의 비참한 생활상을 목격한 뒤 수십여년간 장학금은 물론 책걸상을 기부에 이어 학교건물도 보수해 줬다. 마을에도 사재를 털어 전기를 끌어다 주고 마을회관도 지어 주는 등 노블레스 오블리쥬를 실천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 국민포장, 국민훈장 모란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2016년 10월25일 향년 9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나고야한국학교
나고야한국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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