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민족위해 일생바친 금융거목
’55년 민족금융기관 ‘오사카흥은’ 설립
’82년 자본금 250억원 신한은행 탄생
’95년 日 한신대지진 구호활동 펼쳐
IMF때 재일동포 국내 송금운동 주도

이희건 신한회장
이희건 신한회장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구로공단(현 구로디지털단지)조성에서부터 88서울올림픽과 IMF위기 등 굵직굵직한 현대사에서 재일동포들의 활약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자의든 타의든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동포들은 갖는 차별과 냉대를 뚫고 엔화를 벌어 모국의 경제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이 가운데 잊혀져서는 안 될 재일동포 기업가 6명을 발굴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이희건(李熙健.1917~2011년) 전 신한금융그룹 회장은 신격호 롯데 회장과 함께 재일동포 사회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마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2년 7월7일, 자본금 250억원으로 3개의 은행 점포로 시작된 신한금융그룹은 KB금융그룹과 함께 국내 ‘리딩뱅크’로서 지위를 놓고 흥미진진한 게임을 벌이곤 한다.

이 회장은 일제 식민지 시대이던 1917년 경북 경산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이던 1932년 현해탄을 건너가 무허가 암시장인 쓰루하시(鶴橋)시장에서 자전거 타이어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자 쓰루하시 시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조선인은 물론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뒤섞여 생존을 위한 혈투가 계속됐다.

이런 가운데 쓰루하시 시장은 1946년 8월 연합사령부가 시장을 폐쇄하자 또 다시 혼돈의 도가니로 빨려 들어갔다. 급기야, 이 회장은 미군사령부를 찾아가 시장이 재개되도록 생존을 위한 교섭을 주도한 끝에 이듬해인 1947년 공식 시장으로서 인가를 받아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를 발판으로 이 회장은 시장 상인들의 조직인 ‘쓰루하시상점연맹’을 결성한 뒤 초대 회장에 오른 뒤 1955년 재일동포 민족금융기관인 ‘오사카흥은’을 설립하게 된다.

‘오사카흥은 30년사’에 의하면 당시 쓰루하시 암시장은 하루 먹거리를 구하려고 가보를 돈으로 바꾸는 사람에서부터 전사자 남편의 유품을 파는 아내, 숨겨뒀던 군수품을 파는 이까지 각양각색이었다. 하루 이용객만도 20만명이 찾는 오사카 최대의 암시장이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이 회장은 고국으로 눈을 돌렸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구로디지털단지 등에 재일동포들의 모국 투자가 물꼬를 트고 있었다. 문제는 금융. 기업에 있어 금융이 받쳐주지 못하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던 터이다.

신한은행
신한은행

1974년 재일한국인 본국투자협회를 설립하고 모국의 금융업 진출에 대한 꿈을 키워나간 배경이다. 하지만 초창기 한국정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렇다고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과 정부를 상대로 10년 가까이 공을 들인 끝에 1982년 7월 7일 자본금 250억원의 초미니뱅크를 출범시켰다. 당시 재일동포 341명이 주주로 참여한 신한은 이렇게 해서 한국 땅에 발을 내딛는다. 신한금융그룹은 순수 민간자본만으로 세워진 은행으로, 국내가 아닌 해외동포의 힘으로 일궈낸 금융기관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이 회장은 살아생전 임직원들에게 “재물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신용을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자주했다고 한다.

신한의 성공비결에 대해서도 “무슨 일이든 많은 사람을 참여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신한을 설립할 때 재일동포 다수를 참여시키겠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는 말로 대신했다. 이런 철학은 쓰루하시 암시장에서 얻은 교훈이라는 말을 남기도 했다. 신한의 빛나는 성공 뒤에 또 다시 주목을 받는 것이 바로 모국사랑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에는 재일한국인후원회장을 맡아 100억엔을 모아 한국에 기부하는 등 고국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아 무궁화훈장을 받았다. 재일동포의 올림픽 성금은 올림픽공원에 있는 체조, 수영, 테니스 3개 경기장과 대한체육회 본부, 미사리 조정경기장을 모두 짓고도 돈이 남는 규모였다. 공로명 전 외교부장관은 “거액의 올림픽성금을 모은 이면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면세조치를 끌어낸 이희건 회장의 정치력이 있었다”고 밝혔다.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때는 일본에서 국내송금 운동 등을 주도해 재일동포들의 모국돕기 운동에 앞장섰다. 1990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만국꽃박람회 때 당초 불참하려던 우리 정부를 설득시켰고 1995년 1월 한신대지진 때는 직원들을 총동원해 구호활동을 벌이는 등 양국 우호증진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 회장을 오랜 세월 지켜봐 온 측근들은 그를 ‘사심 없고 자기보다 주위 사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았던 인물’로 기억한다. 신한회장 시절, 본인의 지분을 늘릴 기회를 찾을 수 있었지만, 사욕을 채우지 않았으며 되도록 많은 재일동포에게 주식보유의 기회를 제공해 참여자를 늘리기 위해 애썼고, 대중의 이익을 추구하는 금융사를 만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주주총회가 끝날 때까지 절대 알리지 마라. 장례는 가족끼리 조용히 치르라.”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회사에 누를 끼칠까 염려하는 유언을 남기고 2011년 3월21일 95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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