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로 나라사랑 고향사랑 실천한 작은 거인
2번의 귀향 실패한 뒤 재기 성공
전기제작소 발판, 화학그룹 일궈
4·3 피해 고향 살리기 적극 나서
한국 합성수지산업 발전에 기여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구로공단(현 구로디지털단지)조성에서부터 88서울올림픽과 IMF위기 등 굵직굵직한 현대사에서 재일동포들의 활약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자의든 타의든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동포들은 갖는 차별과 냉대를 뚫고 엔화를 벌어 모국의 경제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이 가운데 잊혀져서는 안 될 재일동포 기업가 20여명을 발굴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가시봉 맑은 정기 타고 자라나/현해탄 저 너머에 쌓아온 보람/

인내와 근검 역행 업을 이루니/마침내 우러르는 님이 되셨고/

애향의 횃불 들어 두루 비추니/거룩한 그대 공덕 찬연하리라.”

안재호 회장
재일 동포 기업가 안재호

1976년 제주도 표선면 가시리 주민들이 재일 동포 기업가 안재호(1915~1994)씨의 고향사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우고 새긴 내용이다. 1915년 제주도 표선리 가시리에서 태어난 그는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3살의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제주도민이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에 터전을 잡은 뒤 오사카죠토상업학교를 졸업을 했지만 학교공부는 가정 형편으로 여기까지. 16살이던 1930년 오사카합성수지화학연구소에 입사해 4년간 기술을 습득한 그는 1934년 대동라이트주식회사로 옮긴 뒤 1939년 오사카 히가시나리구(東成區)에 야스모토(安本)화학공업소를 창립,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던 터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뜻밖에 귀향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수십만명에 이르는 동포들은 본국 행을 택했다. 안 씨는 모험을 걸었다. 그간 모은 돈으로 목조선인 100톤짜리 기범선을 샀다. 이참에 고향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싶었던 것. 그래서 기계 설비도 싣고 동포들의 수송선으로도 활용하면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부푼 꿈을 안고 200여명의 동포들을 싣고 부산항을 향해 출항하기 직전, 급유를 위해 오사카 시리나시가와에 기항하던 중 좌초하고 말았다. 다행히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지만 기계와 설비들은 물에 젖어 사용할 수 없게 됐다. 그럼에도 귀향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제주도 가시리마을에 설치된 재일 동포 기업가 안재호 동상.
제주도 가시리마을에 설치된 재일 동포 기업가 안재호 동상.

식료품 장사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고 일본 규수 지역에서 생고구마 1만관, 말린 고구마, 쌀, 돼지를 대량 구입해 또 다시 고향을 향한 항해에 나섰다. 하지만 이마저도 전쟁 중 폭침된 선박의 잔해에 배가 충돌하면서 전 재산을 들여 구입한 식료품 모두를 바다에 묻고 간신히 목숨만 구했다.

하루아침에 무일푼이 된 그는 종전의 단골이나 친지들에게 간신히 자금을 융통해 1946년 야스모토전기제작소라는 이름으로 재출발한다. 제품 제조는 합성수지 성형재료였지만 주로 배선기구였다.

당시는 물품이 부족했던 시기라 배선기구는 만들기가 바쁘게 팔려나갔다. 여세를 몰아 야스모토전기제작소를 니혼유키화학공업 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하고 플라스틱 단추제조 전문회사인 일본단추공업주식회사도 설립했다. 이 회사는 1960년까지 일본 국내 단추 생산의 70%를 점유하였으며, 1954년과 1955년 내리 ‘일본전국플라스틱 종합전’에서 통상산업 대신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오사카 시장상도 두 번 연거푸 받기도 했다.

이외에도 일본화성공업, 일신화학공업, 동경유기, 호쿠리코화성공업, 야스모토흥산, 영안 등을 연이어 설립하면서 ‘유기화학 그룹’을 이끄는 경영인으로 거듭나는 등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안 씨는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된 뒤 한일경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한국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해 1967년 경기도 안산시에 요소 수지 및 멜라민 수지를 생산하는 대한합성화학공업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당시 이 회사가 생산한 멜라민 식기 및 유리 식기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 공전의 히트상품이 되기도 했다. 이 회사는 일본에서 축적한 기술을 도입해 한국 합성수지 업계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제품의 수출로 귀중한 외화 획득에 기여했다.

하지만 안 씨의 마음 한편에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늘 가득했다. 더욱이 제주4·3 당시 아버지가 희생되고, 가시리 마을 자체가 소개되자 고향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을 더욱 굳게 먹었다. 1956년 고향을 방문한 안씨는 연이은 흉년으로 고향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모습을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우선 자신이 거액을 희사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 고향출신 교포들을 대상으로 고향 돕기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와 별도로 안 씨는 1963년 제주도립병원에 의학 서적을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제주도청에 고성능 쾌속정 희사, 제주도교육위원회에 학교시설 기증, 제주대학교에 도서관 등 비품구입 성금 기증, 제주예총에 한라문화제 성금 지원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재일동포모국공적조사위원회에 따르면 안 씨가 고향에 지원한 기부 규모는 약 1억6000만원. 1950년대부터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액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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