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초대석/전용희 브래든베이커리&커피 대표
“농부가 땅을 사랑하지 않고 알곡을 맺을 수 없어”
중국 전역에 30여개 브래든베이커리 커피 매장 열어
임신중독으로 시각장애인 된 어머니를 향한 남다른 모정
초등학교 출신이 늦깎이로 산동대학 졸업장도 손에 쥐어

전용희 브래든베이커리앤 커피 대표
전용희 브래든베이커리앤 커피 대표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어머니는 네 아들을 데리고 리어카에 계란과 두부를 싣고 이 골목 저 골목을 다니면서 행상을 했다. 어느 날, 동네 아저씨가 계란을 가뜩 실은 리어카를 엎어버렸다. 남의 구역에서 장사를 한다는 이유였다.

길바닥에 깨진 계란이 나뒹굴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큰 아들도 말 한마디 거들 수 없었다. 억울하기 짝이 없고 화도 났지만 대들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늘 막내를 안고 셋째는 리어카에 실고 행상을 나갔다. 리어카가 언덕을 올라갈 때는 큰아들과 둘째가 리어카를 밀어주곤 했다. 어머니는 36세에 청상과부가 됐다. 아버지가 마흔세살의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는 막내까지 임신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네 아들을 키우기 위해 노점상에서부터 파출부, 함바집 식당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큰 아들은 1998년 중국 웨이하이(위해)로 넘어가 다이공생활부터 시작했다. 현재 중국 웨이하이 등 전역에 걸쳐 30여개 브래든베이커리&커피를 이끌고 있는 전용희 대표의 가족사 일부분이다.

“어머니가 저를 임신하면서 임신중독에 걸려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한쪽 눈을 잃은 2급 장애가 되셨어요. 저는 그런 사실을 철이 들면서 알게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까지 잃어 현재는 1급입니다”

전 대표는 어머니를 위해 독도에서부터 만리장성, 미국,요르단, 이집트 홍해바다 등을 구경시켜 드렸다. 정상적인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어머니는 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본다”며 “승리했다”고 자주 말씀하신다고 했다.

아들이 기반을 잡고 나자 어느 날, 어머니는 “사람이란 어느 정도 배움이 있어야 한다. 대학이 어떻게 생겼는지 문 앞에라도 가고 싶다”며 “짱구박사가 쓰는 모자를 쓰고 싶다”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전 대표는 어머니에게 “40세가 넘어 어떻게 대학을 갑니까”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어머니의 소원대로 그는 4년제 대학인 중국 산동대학 중문과를 졸업하게 된다.

전 대표는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중국 웨이하이(위해)로 넘어가기 위해 어머니에게 종잣돈 120만원을 빌렸다. 그의 나이 29세 때다. 당시 어머니의 수중에는 20만원이 전부였다. 어머니의 돈과 함께 교회의 지인에게 100만원을 빌려 총 120만원을 아들에게 내밀었다. 그는 이 돈을 밑천으로 삼고 웨이하이에서 인천을 오가면서 보따리상을 했다. 일명 다이공이다.

당시 웨이하이에서 참깨는 물론 고추, 참기름 등 농산물을 사서 인천의 도매상들에게 넘기고 수익을 얻는 일이다. 하지만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에도 그가 가져온 농산물은 몽땅 세관원에게 압수당했다. 어머니에게 빌린 돈도 거의 바닥이 났다.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그럼에도 세 번째 도전에 나섰다. 웨이하이를 떠나 인천으로 오는 거대한 항공모함같은 배위에서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천 길 낭떠러지 같은 느낌의 시커먼 바닷물이 자신을 삼킬 듯 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인천항 출입국에서 하필이면 ‘저승사자’로 불리는 세관원을 만났다. 거의 사시나무 떨 듯 온 몸이 굳은 상태에서 어머니의 복지카드를 세관원 앞에 보여주었다.

“보시다시피 어머니가 앞을 못 보는 장애2급입니다. 제가 맏이입니다. 어린 동생들이 3명이나 있어요. 그런 어머니에게 돈을 빌려 여기까지 왔는데...선처를 해주십시오.”

무사히 검색대를 통과한 그는 5만원의 수익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의 기도가 통한 걸까? 세 번째 도전 끝에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인천에서 오후 4시에 승선하면 웨이하이에 오전 9시경 도착하는 이런 코스를 일주일에 3번씩 왕래하는 강행군 끝에 6개월 만에 웨이하이에 ‘서울상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고춧가루, 콩, 들기름 등을 인천으로 보내고 인천에서는 한국산 담배, 섬유원단 등을 들여와 팔았다. 조금씩 기틀을 잡은 뒤 레스토랑과 양식업 등에 손을 댔다.

5000만원을 양식업에 투자해 1년 만에 1억5000만원을 번 뒤 2만평 넘는 땅을 사 들였다. 가두리 양식장과 실내양식장을 만들었다. 당시 KBS에서 ‘중국지도를 바꾼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이외에도 SBS등 공중파는 물론 기독교 방송에 출연하면서 그는 일약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CEO중의 한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지난 10월 24일 열린 ‘2019 장한상(장보고한상어워드)’ 시상식에서 전용해 브래든베이커리앤 커피 대표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지난 10월 24일 열린 ‘2019 장한상(장보고한상어워드)’ 시상식에서 전용해 브래든베이커리앤 커피 대표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눈물 젖은 빵, 대륙의 맛을 삼키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중퇴를 하고 충남 부여에서 올라와 장안동에 있는 자장면 집 ‘만리장성’에 취직했다. 한 달 봉급 3만원을 타서 어머니에게 드릴 내복과 세 명의 동생에게 줄 단팥빵을 사서 천호동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에게 단팥빵을 건네자 “나는 배부르다.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라”라고 손사래를 흔들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심순덕 시인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그럼에도 아들은 억지로 어머니 입에다 빵을 넣어 드렸다.

순간, 어머니는 “못난 애미를 만나 너희들을 고생시킨다”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체 어린 동생들도 따라 울었다. 자장면 집에서 일을 하면서 두 손등이 갈라져 피가 흐르는 아들의 손등을 봤기 때문이다.

“어머니 괜찮아요, 나중에 꼭 빵집 사장이 될게요. 그러면 우리 단팥빵 실컷 먹을 수 있잖아요.”

어느 날 그는 교회의 성도가 사온 단팥빵을 먹은 뒤 어린 시절 겪은 눈물 젖은 단팥빵이 갑자기 생각났다고 한다. 2년 뒤 ‘벧엘 베이커리’라는 빵집을 열었다. 하지만 4년 만에 폐업 위기에 처했다. 주일성수가 문제였다. 빵집이 주일에 쉬니까 중국인들이 가게가 망한 줄 알았던 것이다. 거기에 빵을 팔지 못한 빵을 이웃 고아원에 갖다 준 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어졌다. 원생들이 빵을 며칠간 숨겨 놓았다가 먹는 바람에 배탈이 나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전용희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중국 웨이하이시 중심 코리아타운 인근에 있는 브랜드베이커리&커피 프렌차이점
전용희 대표가 운영하고 있는 중국 웨이하이시 중심 코리아타운 인근에 있는 브랜드베이커리&커피 프렌차이점

폐업을 놓고 고민할 때 현재 무소속 국회의원인 손혜원 당시 크로스포인트 대표를 만났다. 한국기독실업인회에서 알게 된 손 의원은 그의 빵을 먹어 보고 “맛있다. 빵만 팔지 말고 커피도 같이 팔라”고 했다. 1∼2년 안에 중국이 세계 커피 소비 1위국이 될 거라면서 가게 실내 스케치한 쪽지를 남기고 떠났다. 그날 이후 손혜원 의원이 남긴 쪽지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한국에 들어갔더니 커피브랜드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어요. 이때까지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 마셔본 적도 없었는데 하루 13잔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웨이하이로 돌아와 손혜원 의원이 남긴 쪽지를 어렵게 찾아내 본격적인 사업구상에 들어갔다. 산동대학에 다니던 시절 만났던 유학생 후배에게 바리스타교육비의 50%를 대주는 조건으로 3개월간 교육을 시켜 시청 앞에 1호점을 냈다. 간판도 브래든베이커리&커피로 바꿔 달았다. 처음에는 ‘원 플러스 원’ 전략을 썼다. 빵을 사면 커피를 줬다. 그런 식으로 커피 맛을 들였다. 3∼4개월 하자 고정 손님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가 2009년이다.

그렇게 시작한 베이커리와 이탈리안 식당이 10년 만에 30여개로 늘어났다. 빵공장의 종업원만도 250여명이 근무한다고 한다. 단팥빵에 눈물 훔치던 꼬마소년 전용희는 어린 시절의 잊을 수 없었던 그 빵을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개발해 중국인의 입맛을 바꾸고 있는 셈이다.

다이공이 맺은 인연

인천의 모래알이 바다건너 웨이하이의 모래와 섞여 인연을 만들었다는 그의 장인의 말처럼 전 대표는 그의 어머니처럼 모진 세월을 견뎌냈다. 다이공, 고달픈 몸을 이끌고 배위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술과 노름에 손을 댔다가 결국 바다위에서 몸을 던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대다수가 다이공을 마지막 종착역쯤으로 생각한다. 텃새도 보통이 아니다. 다이공 상권의 70%는 화교들의 몫이었다.

그가 가진 거라곤 몸뚱아리에 성경책 한 권이 전부였다. 다이공생활을 하면서도 끼니 굶기를 밥 먹듯이 해야 했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밟히고 또 밟혀도 오뚝이처럼 일어나야 했다. 기다리던 가족생각에 그는 더욱 강해져야 했다. 그래서 초보 다이공 전용희는 환심을 사기 위해 동료 다이공들의 짐을 거들어주는 등 몸과 시간을 팔아야 했다. 점차 전용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는 6개월 만에 다이공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다이공생활을 하면서 그는 운명적으로 그의 아내(티엔리신, 田立新)를 만났다. 티엔리신이 다이공의 표를 끊어주는 일을 했던 것.

중국 웨이하이시 중심 코리아타운 전경
중국 웨이하이시 중심 코리아타운 전경

11월22일 레스토랑에서 만난 티엔리신은 “결혼 전 데이트 할 공간도 없었지만 매일 붙어 다녔다”며 “종종 남편이 세발자전거를 빌려 타고 마중을 왔을 정도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두사람은 만난지 2년만인 31살에 결혼 한 뒤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 졸업장도 땄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인 그가 중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었지만 “지극정성인 아내의 도움이 컷다”고 회고한다.

사업도 마찬가지. 처음 웨이하이에 도착했을 때 무허가 사업장이다보니 통장거래를 할 수 없음은 당연지사. 웨하이에 정착하는데 그의 아내가 전 대표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마침내 인생의 동반까지 됐다. 전 대표는 성공비결에 대해 “농부가 땅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알곡을 얻을 수 있겠느냐”며 “중국 그리고 현지인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돈을 벌어 한국으로 보내면 직원들이 대표를 존경하고 따르겠느냐는 설명이다.

티엔리신은 한족출신이지만 그의 부친이 향후 전개될 한중관계를 고려해 조선족학교를 보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연변 사투리를 많이 썼지만 APEC정상회담 당시 통역을 할 정도로 완벽한 표준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전용희 대표의 자랑이다. 거기에 일본어도 어느 정도 소통이 가능하다고 귀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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