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대사관 부지 등 싯가 1조원 사회 환원
방림방적 설립 등 한국경제발전 주춧돌 역할
공장화재와 석유파동 등 불운 겹쳐 재기 실패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구로공단(현 구로디지털단지)조성에서부터 88서울올림픽과 IMF위기 등 굵직굵직한 현대사에서 재일동포들의 활약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일제 강점기 시절 자의든 타의든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동포들은 갖는 차별과 냉대를 뚫고 엔화를 벌어 모국의 경제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이 가운데 잊혀져서는 안 될 재일동포 기업가 6명을 발굴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1월. 주일 대한민국 대표부가 개설되었으나 재정이 극도로 열악해 공관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한국 정부가 발을 동동 굴리고 있을 당시 재일교포 사업가 서갑호(徐甲虎)씨가 구세주로 나타났다. 서갑호씨는 도쿄 미나토구 아자부(東京都港区麻布)라는 도쿄의 최고급 주택가 부지를 매입한 뒤 건축물까지 지어 1962년 한국정부에 기탁해 주일 한국 대사관의 터를 잡게 된다.

대사관 자리는 두쿠가와 막부시대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에도(江戸)숙소였으며 그 후 마쓰카다 마사요시(松方正義), 요나이 미쓰마사(米内光政) 등 총리대신을 지낸 거물들의 저택, 제2차 대전 후에는 주일 덴마크 공사 저택으로 사용된 유서 깊은 곳이다.

서갑호씨는 1915년 경상남도 울주군 삼남면에서 태어났다. 롯데그룹 창업자 신격호씨와 동향인이다. 14살 때 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상점에서 베 짜는 기술 습득을 비롯해서 사탕판매 폐품회수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다.

제2차 대전 후 군수물자 매매로 재산을 축적한 서갑호씨에게 큰 비즈니스의 기회가 왔다. 종전직후 폐기 처분된 방적기들을 사 모아 1948년 3월 사카모토방적(阪本紡績)을 설립했다. 뚜렷한 승산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1950년 봄 가와사키중공업(川崎重工業)을 매입해서 제2 공장을 건설하여 오사카방적을 설립했다. 마치 그해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전쟁 특수로 방적회사는 급성장했다. 1955년 경영부진의 히타치 방적(日立紡績)을 매수해서 경영을 확대했다. 1961년에는 연간매출 100억엔으로 서일본 최대의 방적왕이 되었다. 최신의 설비를 갖춘 사카모토방적 그룹은 전후 일본의 경제부흥을 이끈 10대 방적회사 중 하나로 등장했다. 방적업으로 성공한 서갑호씨는 부동산 호텔 볼링장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1950년도 소득은 1억2000만엔으로 오사카부 고액 소득자 랭킹 1위로 올랐다. 1952년에는 3억 6966만엔으로 일본 전국 고액 소득자 랭킹 5위로 뛰어올랐다. 195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재벌이 되었다.

서갑호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민족적인 차별을 받아가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기업을 키워냈다. 무엇보다 그가 축적한 부를 조국 및 재일 한국인 사회에 환원하는데 적극 나섰다는데서 재일동포사회는 물론 한국경제발전의 선구자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일 대사관 뿐 아니라 오사카 한국총영사관 설립, 오사카 민단이나 민족학교 건설 등에도 엄청난 금액을 기부한 것이다.

최근 민단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대사관 부지 땅값 50억엔을 포함해 서갑호씨가 기부한 금액은 현재 시세로 대략 1조원 정도로 추산된다고 밝힌바 있다.

서갑호 사장(왼쪽)이 1962년 8월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주일대사관 기증증서를 전달하는 장면. [재일민단]
서갑호 사장(왼쪽)이 1962년 8월15일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주일대사관 기증증서를 전달하는 장면. [재일민단]

서갑호씨는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본국투자 요청을 받고 1963년에 한국최대 방적공장인 태창방적을 매수하고, 115억엔을 투자하여 영등포에 방림방적을 설립했다. 방적기 14만 추, 섬유기계 4700대의 설비를 갖춘 국내 최대 방적회사가 되었다. 1964년에 대구 구미 공업단지에 171억엔 투자해서 윤성방적을 설립했다. 두 방적공장 종업원이 4000명으로 일약 한국 방적재벌이 되었다. 재일 한국인 자본의 최초의 본격적인 본국 투자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1974년 1월 조업 직전 윤성방적 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면서 서갑호씨는 궁지로 몰렸다. 그는 공장 처분을 결심하고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려고 한국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한국정부는 냉담했다. 자금 융통에 실패한 서갑호씨는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윤성방적의 화재는 일본 사카모토 그룹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석유파동까지 겹치고 주력 사업인 볼링 붐마저 살아져 1974년에 사카모토 그룹은 640억엔의 부도를 내어 도산했다. 이후 1976년 11월21일 필리핀 출장을 다녀온 뒤 갑자기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쓰러져 운명했다. 그의 나이 61세 때다.

서갑호씨가 막대한 재산을 투입한 본국 투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가 설립한 방림방적의 일본에서 반입한 방적기 최첨단 기술 및 경영 노하우는 한국사회에 그대로 계승되어 한국의 방적업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그가 도쿄의 최고급 주택지의 토지를 대사관 관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였다는 사실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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