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 법인장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있다가 IMF때 구조조정,
1999년 빈에서 자본금 1억원 갖고 1인 기업 창업,
사탕포장지 사업부터 시작해 중간에 여러차례 위기극복,
사업영역 확장 통해 세계 21개국에 36개 법인을 둔 글로벌그룹 일궈
여수 세계한상대회 참석차 한국방문, 지난 21일 전남대 여수캠에서 강연

전세계 21개국에 36개 법인을 둔 영산그룹 박종범 사장(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여수 세계한상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지난 21일 전남대 여수캠퍼스에서 고향 후배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뒤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세계 21개국에 36개 법인을 둔 영산그룹 박종범 사장(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이 여수 세계한상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지난 21일 전남대 여수캠퍼스에서 고향 후배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뒤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중소기업투데이 황복희 기자] 오스트리아 빈에 본사를 둔 영산그룹 박종범 사장(62)을 만난 것은 지난 21일 오후 전남대 여수캠퍼스 한 강의실에서 였다.

지난 22~24일 전남 여수에서 열린 재외동포재단 주최 세계한상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그가 고향 후배들을 위해 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강연장이 위치한 여수시 미평동 언덕배기를 올랐다.

강연 시작 전 잠시 인사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1996년 기아자동차 법인장으로 오스트리아 빈에 갔다가 IMF사태로 구조조정 대상이 되면서 먼 이국땅에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고 20년만에 세계 21개국에 36개 법인을 둔 글로벌 기업을 일구기까지, 그 미소가 적잖은 공헌을 하지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업영역은 자동차 연관사업과 플랜트 수출사업, 수출입 무역업 등에 걸쳐 아시아, 동유럽, 중앙아시아, 특히 아프리카 지역에 활발히 진출하고 있다. 매출규모는 연 5000억원대 정도다.

이 날 전남대 여수캠퍼스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대한민국 청춘이여, 세계를 꿈꿔라’ 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박 사장은 IMF 당시에 본인이 처했던 상황과 어떻게 그것을 극복했는지를 담담히 들려주었다.

“1998년 IMF때는 모두가 절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경제구조와 체계가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됐다. ‘쓸모가 없으면 회사에서 나와야되는구나’라는, 그 전까지는 해보지않았던 생각을 각인시켰던, 대한민국 사회에 모멘텀이 됐던 시기였다.”

박 사장은 아이들 교육을 좀 시키자는 생각에 빈에 남기로 했고, 자본금 1억원을 갖고 독어를 할 수 있는 여직원 1명을 채용해 시작한게 현 ‘영산’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영산’이라는 이름은 고향의 젖줄인 영산강에서 따온 것으로 해외 살고있지만 마음은 항상 고국에 또 고향에 있다며 회사이름이 내포한 의미를 전했다. 박사장은 광주살레시오고교와 조선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올해가 영산을 설립한지 20주년으로 성년에 접어들었다. 당시 창업하면서 가졌던 각오 내지는 전략이라면 ‘마음 속에서부터 기아 배지를 떼자’는 거였다. 겸손한 마음, 가장 낮아지는 마음, 처음부터 시작하자는 마음이었다.”

박 사장은 본인에게 찾아온 첫 번째 위기인 IMF를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아이 컨택(eye contact)’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물건을 팔려는 사람은 항상 을이 되고, 바이어는 갑이다. 갑 옆에서 자주 ‘아이 컨택’을 했을 때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진다. 사실, 앉아서 전화만해도 모든 자료를 보내온다. 하지만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거는 동유럽 등지의 바이어를 직접 찾아다니며 접했기 때문이다. 매년 200일 이상 출장을 다녔고 하루 2~4시간 잠을 자며 땀흘려 일했다.”

박 사장은 1억 자본금으로 할 수 있는 사업거리를 찾다가 당시 초콜릿 공장을 운영했던 페트로 프로센코 우크라이나 전 대통령을 만난 것이 계기가 돼 필름으로 사탕포장지를 만드는 사업에 수월하게 진출할 수 있었다고 했다.

“2000년도엔 한국의 석유화학제품, 수지제품들의 국제경쟁력이 뛰어났던 시기였다. 비닐종이 자체가 필름인데, 그때는 필름하면 코닥필름이 맨 먼저 생각났다. 아무 것도 몰랐던 필름을 공부하며 케미칼사업을 꾸준히 진행하다 2001년경 한국에 오더를 준 인쇄업체 잘못으로 163만불에 달하는 클레임을 떠안게 됐다. IMF 이후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 셈이었다.”

당시 한국업체가 부도후 잠적하고 박 사장 혼자 클레임을 떠안게 된 상황에서 ‘한국업체를 찾아내 보상을 받는게 나은지’, ‘다른 바이어를 빨리 개척해서 새 사업을 하는게 답인건지’를 두고 선택의 고민을 했다며 담담히 옛 기억을 들추었다.

“바이어를 찾아가 그중 인쇄가 제대로 된 필름을 골라내 클레임 금액을 줄인뒤 2년후까지 부분 결제를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정확히 2년6개월만에 전부 상환했다. 이후 바이어들 사이에 ‘JB박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내려졌고 원래 하던 비즈니스인 자동차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위기를 정면돌파로 부딪히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거다.”

다행히 2000년대 중반은 우크라이나 자동차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였고, 박 사장은 파이낸싱으로 오스트리아뱅크와 금융공여시스템을 만들어 자금문제를 해결한뒤 매출이 급속도로 늘어 2008년 1조 매출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해 10월 미국발 금융위기로 동유럽 자동차 수요가 급감하며 1조 매출은 2000억원 아래로 뚝 떨어졌고, 그에겐 세 번째 위기이자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박 사장은 이후 우크라이나 등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기술이전이나 자동차산업 발전 여지가 많은 반제품 차량사업으로 눈을 돌렸고, 관련 사업을 계속 확장해 현재는 8개 공장에서 하루 700~800대 차량을 분해해 포장하고 있다.

“새 차를 분해한뒤 포장해 상대국가에 갖고가서 조립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부품의 경우 관세가 5~10% 밖에 안돼 분해포장 비용을 커버하고도 남는다. 현재는 미래 블루오션인 아프리카 지역으로 사업확장을 꾀하고 있다. 최근엔 아프리카 지역 비포장도로에 적합한 버스를 개발했다. 하체가 튼튼한 2.5톤 트럭의 짐칸에 바닥을 깔고 시트를 놓으면 튼튼한 버스가 된다. 앞부분은 일반트럭이고 뒷부분은 버스 모양이다. 아프리카 지역에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박 사장은 사회공헌 차원에서 음악의 도시 빈에 WCN(World Culture Network)이라는 문화기획사를 운영하며, 오스트리아한인연합회 회장시절 비엔나 한인문화회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접근하면 수명이 짧다. 결국엔 제품에 대한 친밀감을 만들어줘야하는데 문화예술적 공헌이 제품에 대한 로열티(충성도)를 길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는 강연 말미 학생들과의 대화시간에 ‘영산그룹에 지원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하느냐’는 질문에 “기다리지말고 뭔가 도전을 하고 부딪혀야 된다. 아프리카가 열악하나 어려운 가운데 그만큼 리턴도 크게 온다”며 젊은이들이 블루오션인 아프리카로 가겠다면 기꺼이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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