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당시 자주 독립만세운동 외치다
日헌병이 휘두른 칼에 왼쪽 팔 잘리는 참변
시력까지 잃은 뒤에도 여수서 봉사활동전개
일제의 심문에 “나는 피 흘리는 윤혈녀다”외쳐

윤형숙 열사
윤형숙 열사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남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윤형숙 열사가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출신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생모와 사별을 하고 가난에 처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외롭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친척의 소개로 순천 매곡동의 남장로교 미국인 선교사 가정에 식모로 들여보내졌던 그녀는 순천 매산 성서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8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그러던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면서 광주에서도 같은 해 3.10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수피아여학교 2학년이었던 윤 열사는 학생들을 이끌고 군중 맨 앞에서 ‘만만세’를 외쳤다. 또한 윤 열사는 광주읍 청사 앞에서 ‘독립선언문’와 ‘경고 아이천만동포(警告 我二千万同胞)’라는 글을 나눠주며 선두에서 나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보고 일본 헌병대들은 총을 쏘며 해산 명령을 내렸지만 윤 열사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때 일본 기마헌병이 매서운 칼을 휘둘리며 태극기를 휘날리는 그녀에게 돌진했다. 그 순간 그녀의 왼쪽 팔이 땅바닥에 나뒹굴러졌다. 잔악무도한 일본 헌병이 군도(軍刀)로 그녀의 왼팔 상단부를 잘라 버린 것.

그녀는 피가 철철 흐르는 참변을 당하고도 남은 오른팔로 태극기를 다시 집어 들어 더욱 맹렬하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응급치료를 받고서 그녀는 일제의 취조를 받게 됐다. 그녀는 “너의 조정한 배후가 누구더냐 너의 이름이 뭐냐”라는 일제의 취조에 오기가 나고 분통이 터져 “나는 보다시피 피 흘리는 윤혈녀다”라고 대답했다.

왼팔을 잃은 윤형숙의 이명(異名)인 윤혈녀는 어릴 때 ‘피를 많이 흘려서’ 따라 붙게 된 이름이다. 1919년 4월 30일 일본 보안법 위반으로 광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옥살이의 고난 끝에 결국 오른쪽 눈도 시력을 잃고 말았다.

윤형숙 열사의 묘지
윤형숙 열사의 묘지

출옥 후 왼팔이 외눈박이 그녀는 4년간 격리수용조치로 탄압을 받고 1927년 요양 차 전북에서 기독교학교 사감으로 재직하며, 고창에서는 유치원 교사로 봉사활동을 펼쳤다. 1939년 이후에는 고향인 여수로 내려가 청년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와 항일 애국의식 함양에 앞장섰으며 ‘외팔이 여선생님’이라 불렸다.

이윽고 기다리던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1950년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여수를 점령하고 불순분자 색출 령을 내려 내무서원에게 잡혀 투옥을 하게 된 것.

얼마 안 돼 1950년 9월 28일 수도가 수복되자 북한군들은 후퇴를 하면서 그녀와 함께 잡혔던 기독교인들을 총으로 피살했다. 향년 50세로 외로운 생을 마감하게 됐다. 2004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또한 올해에는 3.1절을 기념하여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 잠들었던 윤 열사의 묘에서 첫 기념식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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