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형모의 역사산책

이형모 재외동포신문 회장
이형모 재외동포신문 회장

고구려는 6대 태조대왕 때 ‘선배’ 제도를 창설, 강성한 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태조대왕은 기원 53년 7세에 즉위하여 94년 간 재위하면서, 중국의 한나라를 17년 전쟁으로 제압하고 그 아들 ‘차대왕’과 더불어 고구려 제1차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태조대왕 때 매년 3월과 10월에 ‘신

수두’ 제전을 열고 전국에서 청년들이 모여 칼춤, 활쏘기, 깨금질, 택견, 얼음 물속에서 물싸움, 가무 연주, 사냥시합 등의 종목을 겨뤘다. 각종 종목의 우승자들을 선배라 불렀다. 일단 선배로 선발되면 국가에서 녹을 주어 처자를 먹여 살리고 가정의 대소사로부터 놓여난다.

선배들은 학문에 힘쓰고, 수박(手博), 격검(擊劍), 사예(射藝), 기마(騎馬), 택견, 깨금질, 씨름 등 각종 기예를 모두 익혔다. 멀고 가까운 산을 찾아 탐험하고, 시가와 음악을 익히고, 공동으로 숙식을 했다. 평소에는 환난의 구제, 성곽이나 도로 등의 수축을 담당하고, 전쟁 시기에는 전장에 나아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 공익을 위하여 한 몸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들의 전통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태대형)가 선배들을 전부 모아 부대를 편성하고 전쟁터로 달려 나갔다.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전사할 것을 작정하여, 전사자는 승리자와 같은 영광과 행운을 누리는 자로 대접하고 패하여 후퇴한 자들에게는 침을 뱉었다.

‘상승불패’ 고구려 막강 전력의 비밀은 용감한 선배들이었다. 고구려는 엄격한 골품사회로 미천한 자는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으나, 선배들에게는 신분과 귀천의 구분이 없고 오직 학문과 기술로써만 개인의 지위를 정했기 때문에 그 중에서 탁월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선배’를 이두문자로 ‘선인(先人)’이라고 썼다. 검은 옷을 입어 ‘조의선인’이라고도 불리운 고구려의 선배제도는 단군조선의 ‘천지화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신라의 국선과 화랑

신라의 국선(國仙)과 화랑(花郞)은 진흥대왕이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해 온 것이다. 신라 화랑을 국선이라 한 것은 고구려의 선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앞에 국(國) 자를 더 넣어 지은 이름이다. 고구려의 ‘선배’가 검은 천의 옷(皂帛)을 입었으므로 ‘조의(皂衣)’라 불렀듯이, 신라의 ‘선배’는 꽃으로 장식하였으므로 ‘화랑’이라 불렀다.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고구려보다 5백년 늦게 ‘화랑’을 창설하고 인재를 육성하여 나라를 일으켰다. 기원 540년 법흥왕의 뒤를 이어 진흥왕이 7세에 즉위하자 어머니 지소태후가 섭정하면서 예쁜 여자 둘을 골라 청소년 수련집단의 교사인 ‘원화’를 삼았는데, 두 집단의 지나친 경쟁심으로 ‘준정’이 ‘남모’를 술을 먹여 죽이고는 범죄가 발각되어 준정마저 처형되었다. 이로써 두 무리들은 흩어지고 ‘원화’제도는 실패했다.

“좋은 가문 중에 문무겸전의 출중한 남자를 택하여 그 이름을 화랑이라 하여 받들었다. 그러자 따르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도의로서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산수를 찾아다니며 놀고 즐겼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이 올바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어, 그 중에서 선량한 자를 골라서 조정에 추천했다.”

화랑제도의 출발은 청소년 수련집단의 남자 교사로 세운 것인데 ‘위화랑’이 첫 번째 국선이고 화랑이다. 김대문(金大問)이 쓴 <화랑세기>에는, “현명한 재상(賢相)과 충성스런 신하(忠臣)들이 이로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우수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부터 나왔다.”고 했다.

최치원의 ‘향악잡영(鄕樂雜詠)’을 보면 “시가와 음악으로 연극도 많이 하였는데, 부여사람이나 삼한(三韓)사람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여 밤낮으로 가무가 끊어지지 않았다.”

신라가 그런 습속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이끌 방법을 세워 시가, 음악, 연극, 등을 행하여 인심을 고무함으로써, 그때까지 소국이었던 나라가 마침내 문화, 정치적으로 고구려 및 백제와 대항할 수 있게 되었고 본격적인 삼국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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