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9일까지 학고재 ‘우리가 되찾은 천재 화가, 변월룡’전
“꼭 고국에 가라‘던 호랑이 사냥꾼 조부의 당부, 사후에 성사
레핀대학 수석졸업 후 레핀대학과 평양대학 교수로 활동
'동판화는 렘브란트를 뛰어넘는다'는 평가도

변월룡, 양지(陽地)의 소녀, 1953,캔버스에 유채, 47.5×29cm
 변월룡, 자화상 Self-Portrait, 1963,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75x60cm

[중소기업투데이 이화순 기자] 한국근현대사의 비극 속에서도 예술은 영원하다.

분단의 비극이 낳은 정치적 이유로 인해 한국 미술사에서 지워진 화가. 평생 한국식 이름을 고수하고 조국을 그리워했으나 끝내 환영받지 못했던 러시아 국적 고려인 화가 변월룡(邊月龍 1916-1990). 5월 19일까지 서울 경복궁 맞은 편 ‘학고재’에서 선보이는 ‘우리가 되찾은 천재 화가, 변월룡’ 전시의 주인공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눈에 확 띄는 그림 두 점이 있다. 한 점은 ‘자화상’(1963, 유화). 따스한 마음과 성격이 좋아 사람들과 즐겨 어울리며 인물화를 숱하게 그린 작가가 본인의 초상화는 딱 한점, 그것도 미완성인 채 남겨놓은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특히나 뭔가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입술에 남겨 놓은 채 슬픈 눈과 표정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변월룡은 북한으로부터 숙청을 당하게 되고 10여년간 고국에 갈 수있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더 이상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자화상’에 당시의 고독과 쓸쓸함, 절망으로 무너진 심정이 엿보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또 그가 어머니 사후 40년이 지나서 어머니를그리며 그렸다는 인물화 ‘어머니’(1985,유화)는 한쪽 눈이 찌그러지고 막 울것 같은 주름지고 백발이 성성한 한복 차림의 어머니 모습이다.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았던 화가는 어머니 생전에 좀더 효도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회한, 자신의 정체성이자 뿌리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이렇게 작품화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중략)’

알렉산드르 푸시킨을 제일 좋아해 푸시킨의 고향 풍경까지 그림 그렸던 그에게 푸시킨의 시(詩)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애창시였다. 삶이 안겨 주는 슬픔과 우울을 담담하게 인내하라고 당부하는 푸시킨을 통해 변월룡 화백은 많은 위로를 받았음직하다.

변월룡, 어머니 Mother, 1985,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19.5×72cm
변월룡, 어머니 Mother, 1985,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19.5×72cm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 유랑촌서 유복자로 출생  

변월룡은 연해주 쉬코토프스키 구역의 유랑촌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호랑이 사냥꾼인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그는, 깡촌 중의 깡촌에서 자랐지만, 26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러시아 최고 미술대학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레핀 회화·조각·건축 예술대학’(이하 레핀미술대학)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어린 월룡에게 할아버지는 늘 “나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호랑이를 쫒아 연해주를 유랑했지만, 너만은 꼭 고국으로 돌아가 살아라!”라고 생전에 강조했다고 한다. 손자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병진년 용띠 해 달밤에 태어났다고 월룡(月龍)으로 지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변월룡은 할아버지의 뜻을 따라 ‘월룡’이란 이름을 고수했다. 작품에도 꼭 한글 사인을 넣었다. 하지만 고국에서의 삶은 고작 1년 3개월에 그치고 말았다. 그의 고향이 함경북도 무산으로 추정되는 만큼, 그에게 고국은 북한이었는데, 결국 그는 북한으로부터 이용당하고 버림받아 죽기전까지 고향을 그리워하다 눈을 감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북한 당국의 초청으로 평양미술대학 학장 겸 고문으로 취임했지만, 북한 당국의 무리한 귀화 종용을 따를 수 없어 거절하자 결국 숙청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생전에 사람들에게 다정다감하고 인심이 후했던 그는 사후(死後)에 다른 반쪽의 고국과 인연을 맺게 된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작가를 재조명하는 ‘백년의 신화:한국근대미술 거장’전에서 이중섭, 유영국과 더불어 변월룡의 성대한 전시를 선보인 것이다. 같은 해에 제주도립미술관에서도 ‘고국의 품에 안긴 거장, 변월룡’전이 열렸다.

비록 육신은 타국에 묻혀있으되, 그가 영혼을 쏟아부은 예술 작품은 마침내 고국의 품에 안겼다. 특히 이 전시회는 북한에서 숙청시킨 화가를 남한에서 거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레핀미술대학 로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변월룡 [학고재]
레핀미술대학 로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생전의 변월룡 [학고재]

호랑이 사냥꾼 할아버지 소원...死後 예술만 고국행 

이번  ‘우리가 되찾은 천재 화가, 변월룡’전은 3년만에 맞는 세번째 고국 전시회인 셈이다. 변월룡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국내에서는 낯설다. 그런 까닭에 이번 전시회의 전반적 개념을 변월룡 화백의 일대기에 초점을 맞춰 입체적으로 전시, 나무보다는 숲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등 러시아인들의 초상화와 풍물들, 북한 인사들과 50년대 평양, 무용가 최승희, 월북작가 김용준, 이기영의 초상화도 있다.

렘브란트를 특히 존경해 동판화에 몰입했다. 덕분에 일부에서는 ‘동판화에서만큼은 변월룡이 렘브란트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릴 정도다. 전시장의 작품들, 특히 데생과 동판화 유화 속 인물과 풍경 표현이 생생해 마치 작품 속 인물과 풍경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일 것처럼 걸출하다.

변월룡을 고국에 안내한 사람은 문영대 미술평론가다. 회화 전공 후 1994년 러시아 게르체나 사범대학에 편입해 공부하던 유학 첫해에 한 그룹전에서  우연히 한국적 정서를 간직한 변월룡 화백에 꽂힌 인연으로 사반세기에 걸쳐 그를 한국에 소개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문영대 평론가는 “당시 수소문해서 변월룡 화백을 찾았는데 아쉽게도 1990년 한러 수교 3개월 전에 사망하셔서 정말 마음 아팠다. 다행히 그분 아들 딸과 친분을 유지하게 돼 한국에 소개하게 됐다”고 밝혔다.

학고재 우찬규 대표는 "전시명처럼 ‘우리가 되찾은 천재 화가’를 국내에 제대로 소개하고자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 많은 국·시립미술관에서 변월룡 화백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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