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동경 수림외어전문학교
개교30주년 기념 심포지움
신경호 이사장, 폐교위기서
인재양성의 요람으로 우뚝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일본 금정학원(이사장 신경호)이 금정학원 개교 30주년을 맞아 설립자인 고 김희수(1924-2012)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기 위한 학술 심포지움을 지난 2일 일본 도쿄의 수림일본어전문학교에서 개최했다.

김희수 전 중앙대학교 이사장은 고국과 고국의 교육에 남다른 애정으로 가득찬 삶을 살았다. 1924년 경남 창원 출생으로 일본 도쿄전기대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그는, 1987년 사재 수 천억원을 출연해 중앙대 학교법인을 인수하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21년간 중앙대학교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중앙대학교의 발전과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 오롯이 공헌하는 삶을 살았다.

이날 심포지움은 도쿄가쿠게이대학 이수경 교수의 ‘재일 한국인의 조국에의 교육·육영사업 공헌에 대하여’라는 주제 강연을 시작으로, 다이토분카대학 나가노 신이치로 명예교수 등 6명이 강사로 참여했다.

신경호 금정학원 이사장은 기념사를 통해 “80년대 국제화가 본격화 되면서 국가와 지역을 초월한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년의 준비 끝에 1988년 수림외어전문학교를 개교했다”며 “그러나 한국이 IMF경제체제로 돌입, 교직원들의 월급을 지급할 수 없는 등 폐교직전으로 몰렸지만 교직원들의 교육에 대한 남다른 사명과 열정으로 학교를 정상화시켜 오늘 개교 30주년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수림외어전문학교 설립자이신 고 김희수 선생님은 당시 학교 설립의 실무를 총괄했던 故 정동호 선생님과 젊은 청년인 신경호의 말에 귀 기울어주신 교육자였다”고 회고했다. 이날 6명의 주제발표 내용을 정리했다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육학부 교수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 교육학부 교수

 

 재일한국인의 조국에의 교육·육영사업 공헌에 대하여

오랜 유교문화와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조국은 일본 식민지가 된 후 구습과 가난, 탄압의 공간이었다. 고국을 떠나 지배국 일본으로 건너간 초기 재일교포들은 지배국의 이문화와 편견‧차별 속에서도 개인의 영달보다는 민족과 조국의 발전을 기원했다. 200만명 이상의 재일교포는 망향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금의환향의 꿈을 품고 살았다. 그 후 해방을 맞아 재일교포들은 귀국을 위해 한글 강습소를 시작으로 민족교육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쟁이라 불리는 동족간의 전쟁으로 미증유의 희생과 폐허를 맞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 통화 1000엔, 250파운드(약113kg) 외엔 반출이 금지되어 교포들은 전재산을 두고 귀국해야 했다. 일본에 기반을 쌓은 사람은 일본에 잔류하게 된다. 하지만 재일교포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의해 일본 국적에서 제외되고 외국인에 대한 극한의 차별을 겪어야 했다. 이런 과정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삶을 개척한 재일교포도 적지 않았다. 이번 개교 30주년을 맞은 수림외어전문학교의 설립자인 김희수 전 이사장은 전쟁 중에 일본에서 공부하여 일본과 조국의 교육 사업에 전력했다.

 

김희수의 철학과 인생관

나가노 신이치로 다이토분카대학 명예교수
나가노 신이치로 다이토분카대학 명예교수

김희수는 1924년 경남 창원군 진동면에서 태어나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진동공립보통학교 입학 후 일본식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통학교 4학년 때 만난 한국인 교사는 김희수에게 한국어와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며 지혜와 용기를 준다. 1938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김희수는 부친을 찾아 일본 도쿄로 건너간다. 당시 아버지로부터 정직과 신용의 중요성을 배우는 한편, 우유배달과 신문배달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도쿄 전기학교를 무사히 마쳤다. 이후 도쿄 도심 유라쿠초 역전에 양품점을 개점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도교전기대학에 입학해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이후 형과 후타바어탐지기 사업에 이어 철강회사를 설립·운영하다 자금조달의 어려움으로 이를 매각, 4000만엔의 종잣돈으로 부동산임대업에 뛰어들었다. 도쿄 긴자에 임대 빌딩 제1호를 건축한 뒤 20년 만에 13개 빌딩, 25년 만에 23개 빌딩을 소유하면서 5개의 계열회사를 둔 가나이 그룹을 형성하게 된다. 이어 1988년 도교에 수림외어전문학교를 설립하고, 1999년에는 일한 통역번역학과 일중통역번역학과 일본어학과로 개편하고 2001년에는 수림일본어학교를 설립했다. 이와함께 1987년 중앙대학교의 부채 700억원의 부채를 갚아주고 경영권을 인수한 다음 21년간 대학발전에 진력하다가 2007년 두산그룹에 경영권을 넘겼다.

이경규 동의대학교 교수
이경규 동의대학교 교수

 

동교 김희수 선생의 삶에서 배우다

일제 강점기 시대, 우리 민족에게 가난은 마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재일동포들의 삶은 말 그대로 고난과 눈물, 처절한 삶으로 점철된 한(恨)의 역사다. 김희수 선생의 삶은 배우지 못한 한, 배고픔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던 가난의 한,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살아야 했던 망국의 한에서 시작됐다. 이런 한을 딛고 재일동포 기업가 중에는 조국의 어려운 경제 현실을 생각하여 조국에 투자하고 기부하는 기업가가 많이 있다. 그러나 김희수 선생을 제외하고는 교육 사업에 투자하는 기업가는 없었다. 김희수 선생은 교육 사업에 대해 투자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기부라고 생각했다. 1987년 경영난에 봉착한 중앙대학교 인수를 선뜻 결정한 것도, 그리고 조국의 문화예술진흥 발전을 위해 수림문화재단을 설립한 것도 교육에 대한 김희수 선생의 염원에서 비롯됐다.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완성되듯, 김희수 선생의 삶은 사회지도층이 사회에 대한 책무를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삶을 실천한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김희수 선생은 그의 좌우명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몸소 실천했다. 그는 돈을 남기고 떠난 자리는 다툼과 욕망으로 존재하지만, 올바른 사람을 남기면 그가 떠난 자리에 사랑과 평화가 충만할 것이라는 그의 평소 말처럼 살았다. 그는 진정으로 공수래공수거의 삶을 실천하고자 했기에 사람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고 고심한 흔적만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김희수 선생의 경영전략과 기업가정신(임영언 한남대 교수)

임영언 한남대 교수
임영언 한남대 교수

김희수 선생의 경영철학은 ‘배워야 산다’라는 조부모의 가르침과 함께 정직과 신용을 무기로 일본인의 차별에 대한 사업적 복수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끊임없는 도전과 창업정신, 그리고 글로벌 시대의 혁신적 마인드를 겸비하고 ‘절약, 내실, 합리, 신용’을 모토로 기업을 일구었다. 1947년 해방 전 후 물자가 워낙 부족했던 시절 금정양품을 창업한 것도 사업가로서의 탁월한 식견력과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는 사업가로서의 기질도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울러 “돈만 보고 사업을 하면 모두 불행해질 수 있지만 모두의 행복을 위해 일하다 보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내 이익보다 고객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라는 경영철학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도 앞장서왔다. 특히 김희수 선생이 일으킨 금정기업은 부동산서비스업에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원칙과 땅이나 건물을 되팔아 이윤을 남기는 일을 철저히 배제하는 경영철학을 고수했다. 특히 김희수 선생은 한국이나 일본 어느 쪽에 치우치기보다는 한일양국에서 확고한 경영철학을과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일본적 사업성공과 모국에서 인재양성이라는 교육 사업을 마지막까지 몸소 실천했다. 그가 소유했던 생전의 빌딩이나 대학에서의 흔적은 거의 사라지고 있지만 그의 정신적 울림은 후손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

박철의 본지 대표‧발행인
박철의 본지 대표‧발행인

 

배움과 가난, 망국의 한을 인재양성으로 승화시킨 거인 김희수

1987년 4월3일 전두환 정권은 군사정권을 이어가기 위해 당해 4.3호헌조치를 선포하자 대학생들이 호헌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 나왔다. 여기에 넥타이부대들이 합류하면서 6.29선언을 이끌어 냈지만 한국의 정세는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야말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형국이었다. 이런 가운데 김희수 이사장이 중앙대를 인수하자 학생들은 물론 교직원들이 가세해 학원민주화라는 미명하에 김희수에게 돈을 더 내라는 시위대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이어 1988년 서울대 학생회장에 출마했던 한 후보가 ‘남북학생회담’을 공약으로 걸면서 학원가는 연일 시위대로 들 끊었고 1989년에는 중앙대 학생회장이었던 이내창씨가 거문도 앞바다에서 변사체로 떠오르자 중앙대는 진상규명을 위한 시위까지 복잡하게 얽혀져 단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이런 정국에서도 김희수 이사장이 중앙대를 인수한 것은 그만큼 교육에 대한 남다른 사명과 그만의 철학이 바탕이 됐다. 김희수 이사장이 설립한 수림외어전문학교도 한국의 IMF체제로 편입될 즈음 폐교위기로 몰렸다. 당시 중앙대 실세였던 박범훈 처장이 수림외어전문학교를 폐교하고 김희수 이사장의 일본 내 재산을 모두 처분에 한국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신경호 이사장이 이를 거부해 오늘 30주년을 맞았다. 김희수 이사장은 살아생전 “다음세대에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하(下)의 인생이요, 사업을 물려주는 것은 중(中)의 인생이며, 사람을 남기는 것이 바로 상(上)의 인생”이라며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야말로 그가 죽는 날까지 꿈꾸었던 삶의 목표였다.

 

국밥 한 그릇의 작은 거인, 교육100년, 한민족 1000년 대계 선각자

노치환 이수현의인문화재단설립위 사무총장
노치환 이수현의인문화재단설립위 사무총장

김희수는 식민치하의 조국을 떠나 현해탄을 건너며 ‘성공하고 돌아오리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고, 도산 위기의 중앙대를 오늘의 명문사학으로 발전시킨 견인차 역할을 했음에도 중앙대와 동문으로부터 어떤 감사도 명예도 얻지 못했다. 조국과 민족을 너무 사랑한 것이 죄라면 죄가 되어 한을 품고 불행한 삶을 마감한 바보였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만약 김희수 선생이 중앙대에 투자하지 않았다면 한일 양국의 자산 가운데 일부라도 어떤 형태로든 일본 버블로부터의 줄도산은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재산 상속에 있어 혈육 승계가 체질화돼 있다. 하지만 김희수는 생전, 자녀에게 재산이나 사업을 상속해야 하는 전통적 사고를 초월, 사회공유자산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초월적 이타적 사고가 김희수 정신을 더 숭고하게 만든다. 이제부터는 고인의 코스모폴리타니즘, 인류애 정신에 입각하여 유족은 유족대로, 사회적 유업을 이어받는 이들은 주변상황에 얽매일 필요 없이 보다 주체적으로 책임감으로 고인의 유업을 잇고 빛내는 일에 매진하기를 희망한다. 도산위기의 중앙대를 김희수가 전 재산을 살려낸 것처럼 3억엔 도산에 직면했던 일본의 수림외어전문학교를 신경호 교장이 살려내 김희수를 기리는 일을 도쿄에서 행하는 일은 참 귀감이 된다. tie240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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