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에서 내년 3월20일까지 개최
최성숙, “문신에게서 벗어나 내 예술에 몰입하고파”
두 부부 작가의 매력적인 대표작과 미공개 작품 한눈에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명예관장이기도 한 최성숙 작가가 작품 전시장에서 예술과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화순]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 명예관장이기도 한 최성숙 작가가 작품 전시장에서 예술과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화순]
문신의 대표작들을 설치한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의 전경. 
마산항이 내려다 보이는 문신미술관 정원에 작품 '화3(Harmorny3)'가 서있다. 문신 부부는 작품이 팔리면 그만큼 진척해가며 바닥까지 생전에 직접 다듬었다. 1994년 완공, 이후 시에 기증했다. [이화순]
문신의 원형조각들과 석고조각(오른쪽), 그리고 최성숙 회화(왼쪽)가 전시되어 있다. [이화순]
문신의 원형조각들과 석고조각(오른쪽), 그리고 최성숙 회화(왼쪽)가 전시되어 있다. [이화순]
문신원형조각들
문신원형조각들

[중소기업투데이 이화순 기자]  한편생 남편의 예술 세계를 더욱 빛내고자 자신을 돌아볼 여력이 적었던 아내가 숨겨두었던 예술성을 한껏 펼쳤다. 마산이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 문신(1923-1995)과 그 아내인 화가 최성숙(72)이 함께 한 예술과 일상이 창원시립마산문신미술관(이하 문신미술관, 명예관장 최성숙)에서 내년 3월20일까지 관객을 만난다. 전시명도 ‘문신과 최성숙이 함께 한 40년:예술과 일상’전이다.

문신· 최성숙 결혼 40년, 개인전 같은 부부전

올해는 최성숙과 문신이 만난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1978년 파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와 나이차를 극복하고 이듬해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에서 티셔츠 차림으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 만남은 서로의 예술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었다.

문신 최성숙 부부는 1981년 문신의 고향인 마산 추산동 언덕에 정착했고, 문신이 20대부터 염원해 오던 문신미술관 건립을 현실화했다. 이번 전시에는 두 작가가 이룬 예술업적을 조명하고 있다.

문신과 최성숙의 160여점의 작품을 통해 두 작가가 평생을 이루어온 예술세계를 압축해 보여준다. 전시 작품은 최성숙의 1978년부터 2018년까지 회화 80여점, 문신의 1946년부터 1990년대초까지의 유화, 조각, 채화, 드로잉 80여점을 선보인다. 최성숙의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마스 장날’(1978), ‘신의 요정:녹턴&카프리치오’ 연작, ‘지리산의 겨울밤’(1998년), 문신의 ‘어부’91946), ‘태평로에서’(1959), ‘개미’(1989), ‘비상’ 연작 등 두 작가의 대표 작품을 비롯해 문신의 미공개 채화, 드로잉 40여점이 전시되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적힌 문신 미술관 전시장 내 대형 걸개와 그의 석고 조각.
 ‘문신과 최성숙이 함께 한 40년:예술과 일상’전 포스터와 문신 작품.

 

프랑스 독일이 사랑한 세계적 조각가 문신

문신의 일생은 모험과 도전의 삶으로 요약된다. 식민국 일본에서 광부로 일했던 마산 출신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해방과 분단, 전쟁, 이산 따위로 얼룩진 격변의 근대사를 관통해왔다.
5세에 일시 귀국한 부모 손에 이끌려 마산에 정착하지만 일년 뒤에 할머니 손에 맡겨지고 부모와는 생이별했다. 어머니는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15세이던 1938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일본으로 밀입국을 시도해 일본미술학교 양화과에서 유럽의 근대미술 기법을 습득했다. 38세인 1961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조각가로 변신하게 된다.

문신이 세계적 작가로 떠오른 것은 1970년 지중해 연안의 발카레스 사장미술관의 조각심포지엄에 13m의 거대한 토템조각 ‘태양의 인간’을 제작하면서다. 지금도 발카레스시는 문신 조각 ‘태양의 인간’이 전면에 소개된 책자와 포스터를 통해 도시를 해외에 홍보할 정도다.

세계적 작가로 떠오른 문신이 결혼 후 한국으로 귀국할까 걱정하던 당시 파리 시장이던 시라크 전 대통령이 문신의 귀화를 추진, 이를 막으려던 박정희 대통령과 충돌한 ‘국적 전쟁’은 유명하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받는다'는 글귀가 적힌 대형 걸개와 문신의 석고 조각.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평가받는다'는 글귀가 적힌 대형 걸개와 문신의 석고 조각.

 

음악인 마저 경탄했던 문신의 미학

프랑스를 떠난 문신의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던 세계 미술평론가들은 1988년 서울 올림픽공원에 설치된 문신의 국제야외조각전을 계기로 세워진 25m 높이의 ‘올림픽 1988’을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프랑스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와 슈리 게라, 안티 리보타 당시 파리 아트센터 관장 등은 최고의 작품이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특히 피에르 레스타니는 ‘우주와 생명의 음률’이라고 칭송했다.

2007년 8월 11일 독일 휴양도시 바덴바덴 쿠어하우스에서 바덴바덴필하모닉은 '생명, 조화, 선율’을 주제로 한 ‘국제미술영상음악제’를 열고 문신의 조각 작품에 영감을 받아 특별히 작곡된 ‘문신 교향곡(Eleonthit)’을 연주하며 그를 기렸다.

평론가 김영호 교수(중앙대)는 “문신의 예술은 자연물을 상기시키는 형상의 세계이자 유기적인 선과 볼륨의 형태로 표현된 순수 추상의 세계”라며 “그의 예술세계는 시메트리(symmetry·대칭)의 미학”이라고 평한다.

최성숙의 '추산동의 가을'(1985, 52x149cm, 황화선지, 동양화 채색)
최성숙의 '추산동의 가을'(1985, 52x149cm, 황화선지, 동양화 채색)

 

최성숙, 내조자에서 작가로 홀로서기

문신미술관에서 만난 최성숙은 “이제는 문신에게서 탈출하는 거야. 앞으로 남은 인생은 내 작품만 생각하고 내 예술만 생각할거야”라며 미소짓는다. 결혼 후 최성숙은 문신의 창작활동을 지켜보며 자료들을 정리하는 한편, 귀국후 마산 추산동 황무지 위해 오늘날의 문신미술관을 지었다. 당시 마산시에 미술관을 헌정하고 숙명여대에 문신미술연구소를 설립했으며 대한민국 제1호 대학 미술관을 열고, 시와 함께 원형미술관까지 개원했다.

 

최성숙의 '강강수월래'(1987년, 74x145, 황화선지에 먹, 동양화채색)
최성숙의 '강강수월래'(1987년, 74x145, 황화선지에 먹, 동양화채색)

그런 그가 이제 독립을 외친다. 최성숙 작품들을 보면 ‘그가 ‘문신’이라는 거대한 예술가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나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서구 화법을 공부한 그에게 동양화 서양화 식의 구분과 경계는 무의미했다. 그냥 ‘최성숙 회화’였다. 캔버스 위에 먹과 동양화 재료를 쓰기도 하고, 화선지에 아크릴을 쓰기도 했다. 그림이 확장되어 그림 밖 액자까지 작품이 되었다. 컬러감이 신비롭고 매혹적인데다가 강렬하면서도 단순하고 그림 속에 리듬감이 가득하다. 풍경화 속에 샤갈, 클림트의 명화들이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들어가 있는가 하면, 음악이 있고 향기가 떠돈다. 순백색의 영혼이 춤추고 깔깔 웃으며 삶을 노래하고 관조하는 느낌이다.

최성숙의 '신의 요정-녹턴&카프리치오'(2016, 87x75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최성숙의 '신의 요정-녹턴&카프리치오'(2016, 87x75cm, 캔버스에 아크릴릭)

 

흥과 신명이 춤추는 장르 파괴 회화 선보여

김영호 교수는 화가 최성숙의 작품은 ‘흥(興)의 그림’이라 말한다. 어찌보면 신내림이라도 받은 듯한 즉흥성도 보이는 그의 그림은 곧 마음 수행법의 하나였으리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무녀가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흥을 돋우어 신명을 체험하고 일상과 추월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 듯 작가는 그림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고 애환을 추억하면서 다시 삶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것 말이다.

“난 아직도 가슴이 뛰어요. 그림 그리는 것이 행복하고, 정말 재미있어요. 어제 본 게 오늘 또 다르니 얼마나 공부할 게 많아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후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의 작가로서의 전시 기록은 1975년 ‘윤여환·최성숙전’으로 서울신문회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첫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32세에 동생(최민숙·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이 유학중인 독일 쾨팅겐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당시의 여행 체험이 바탕이 되어 제1회 개인전 ‘겨울여행’을 선보였고 이후 13회의 개인전을 더 갖는다.

최성숙의 작품는 ‘산수풍경’ ‘조충과 정물’ ‘십이지신’ 시리즈들이다. ‘산수풍경’시리즈에서는 화선지나 장지에 먹과 채색을 주로 하고, 때로는 족자에 그리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서면 전통적 재료를 넘어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사용해 재료와 형식의 경계를 벗어버린다. ‘조충과 정물’ 시리즈에서는 면직물의 하나인 소창에 아크릴 물감과 색연필로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에서는 아주 섬세한 선만을 그리는 백묘법(白描法)이 돋보인다. ‘십이지신’ 시리즈에서는 캔버스에 아크릴릭을 본격화하고 유화 액자를 도입해 동양화와 서양화의 경계를 허문다. 강렬한 색채 대비에 단순한 화면구성이 돋보인다. 김복영 평론가는 “용 뱀 닭 쥐 등 십이지 상징 동물들을 확실하게 자신의 대리 주체로 등장시키며 행복을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자 한다”고 평한다.

최성숙의 '덴마크의 인어공주'(2015, 55x46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최성숙의 '덴마크의 인어공주'(2015, 55x46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이 전시의 숨은 공로자는 지난 10년간 최성숙 관장과 함께 해온 학예연구사 박효진씨(40·이화여대 조형예술학 박사과정 수료)다. 박효진씨는 “스스로 뛰어난 화가이면서 남편 문신의 예술 세계에만 빠져 사는 최성숙 관장이 안타까워 늘 마음에 두었던 전시를 때가 되어 펼쳐보이게 되어 기쁘다”고 수줍게 말했다. marcell@sbiztoday.kr

최성숙의 '노르망디의 봄'(1984, 145x74cm, 캔버스에 아크릴릭)
최성숙의 '노르망디의 봄'(1984, 145x74cm, 캔버스에 아크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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